• 최종편집 2024-03-29(금)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Ⅵ

7일차 1월13일(토) ( 럭나우 --> 아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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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02.0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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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5시에 기상, 6시 아침공양, 6시30분 출발 아그라로 6시간 이동 , 아그라 시내 관광


26. 아그라 시내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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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요새

무굴제국 Mughal Empire(1526~1857)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북인도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조. 주요 영토는 인도 지역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발원지는 아프가니스탄이며, 초창기의 세력은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이다. 때문에 몇몇 서적에서는 이를 두고 제2차 티무르 제국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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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정식 명칭은 구르카니 혹은 구르칸으로, 그 어원은 부마를 뜻하는 몽골어 귀르겐(gŒregen)이며, 이는 티무르를 비롯한 티무르 왕조의 여러 군주들이 칭기스 왕실의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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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멸망 이후 그 영토에 세워졌던 많은 나라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몽골 제국과의 연관성에서 찾았으며, '칸'은 명목상으로나마 칭기스칸의 직계 혈통인 황금씨족(altan urug)으로 세웠는데, 이는 티무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바부르는 티무르의 5대손으로서, 이미 몽골제국 붕괴 이후 100년도 더 지난 뒤이기에 이러한 전통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무굴 황실은 전반적으로 칭기즈 칸의 혈통보다는 티무르 왕조의 일원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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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역 면에서는 남인도의 복속엔 실패하고 북인도를 차지하는 데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이슬람에 근거해서 다수의 힌두교도를 지배하는 방식이라 사상적으로 불완전했기 때문에 존립 내내 각처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인도가 워낙 넓다 보니[6], 북인도의 왕조 가운데 데칸 고원 너머의 지역까지 완전히 차지한 왕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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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무굴 제국은 마우리아 왕조 등과 함께 인도를 거의 통일한 몇 안 되는 왕조다. 동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가 중국에 존재했는데, 북동쪽으로 영토가 겹쳤지만 그 영토 사이에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 중 하나가 사이에 있어 별다른 영토분쟁 없이 그냥 무역만 하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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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두 국가가 붙었다면 그야말로 아시아 전쟁사 중 세기의 대결이었겠지만, 전기 무굴의 전성기였던 악바르 1세-자한기르-샤 자한-아우랑제브 시대와 청의 전성기였던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대의 차이가 있어서 두 제국 모두 전성기일 때 전쟁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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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이 한창 전성기일 때는 명나라가 쇠해가는 시절이었고 청나라가 흥하던 때에는 무굴 제국이 골골거렸으니 신의 후계자로 지목, 인도아대륙에 그의 영향력을 심어 놓았을 따름이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여러 해 동안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1526) 왕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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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왕조 역사

▶초기

첫번째 황제 바부르[7]는 티무르의 자손이자[8] 모계로 징기스칸의 혈통[9] 을 잇는 인물로 본래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던 군주였는데, 티무르 왕조의 내전과 우즈베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가 1504년, 카불을 점령했다. 바부르는 이후에도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에 대한 재진출을 시도했으나, 우즈베크인들에게 패배해 번번이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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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바부르는 인도로 시선을 돌렸는데, 바부르는 과거 티무르가 인도를 점령했었고 자신은 티무르의 후손이므로 자신이 인도를 지배해야 할 정당한 군주라고 주장하며 인도를 침공했다. 결국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바부르는 금요 설교를 '힌두스탄의 황제'로서 진행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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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즈음하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인들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는데, 바부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후마윤과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무굴제국의 상황은 열악했다. 심지어 바부르의 후계자인 후마윤(1530~1556)은 재위 9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군벌에게 패배해 이웃한 페르시아로 거점을 옮겨야 할 정도였다(1540).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의 힘을 빌려 15년 만에 겨우겨우 인도로 돌아왔으나,[10] 1년을 다 못 채우고 사고[11]로 죽었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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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악바르 1세 (1542~1605, 재위 1556~1605). 흔히 악바르 대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굴은 바로 이 대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열세 살에 즉위해 근 50년간을 재위한 3대 황제인 악바르 대제가 명군이었기 때문이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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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지배 민족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그 종교적 관용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은 물론 지배계층 및, 황족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이슬람교 전통의 지즈야, 곧 타 종교인들에게만 거둬들이는 인두세도 폐지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하고, 본인 자신도 힌두교인인 라지푸트 출신의 공주[13]와 결혼했으며, 힌두교계 학자와 신하들도 이슬람계와 아무 차별 없이 등용하고 신임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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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까지 땅 없이 떠돌아다니기 일쑤던 시크교도에게도 힘을 실어주어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도 만들어주었다. 1580년대 이래 악바르의 지배에 놓인 시점 이래 시크교가 자리잡은 펀자브 지방은 지금까지도 가장 큰 시크교의 성역이 되었다. 아 물론, 이러한 조치에 모두가 환영한건 아니고 당연히 무슬림들은 발끈했지만 황제는 그딴 거 신경 안 썼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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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는 치세 중 단순히 종교적 관용만을 베푼 것이 아니라 종교적 토론 또한 즐겼다. 아예 궐내에서 악바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각 종교 대표 논객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논리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동조하거나 등등의 견해 차를 보이며 치열한 입싸움을 벌였고, 악바르는 그 논쟁을 지켜보길 즐거워했다. 여하튼 이 악바르 치세를 기점으로 행정적 체계[19] 또한 갖춤으로써 비로소 안정기를 지나 팽창기에 들어선다. 학자들은 악바르의 치세를 기점으로 하여 인도의 군벌 국가가 제국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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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방글라데시인 벵골 지역이 인도에 귀속된 것도 바로 이 시기(1576년). 그의 시기 무굴 제국은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으며, 이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명나라의 힘이 기울어가던 시점이었다. 그 당시 무굴 제국과 명 제국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밋거리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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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악바르의 동시대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면, 악바르 때 인도에서는 툴시다스라는 시성이 활동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 무렵 쉴레이만 대제 치하에서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악바르와 쉴레이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거나 사절을 보내는 등의 교류를 하였으며, 악바르 시대에 인도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포르투갈에 맞서는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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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기르와 샤 자한

악바르 대제의 뒤를 이은 4대 자한기르 역시 수완가였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귀족의 어머니를 두었고,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티무르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22] 하지만 자한기르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나빠졌다. 시크교가 자한기르의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게 획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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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국의 역사 내내 시크교와의 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크교와의 갈등은 종교적이라기보다도 정치적인 문제였고, 자한기르 본인은 아버지처럼 타 종교에 우호적인 편이어서 관용 정책을 지속해나갔다. 압둘 아지즈의 연구에 의하면 자한기르 때 국고에 쌓인 금이 7톤, 은이 1116톤, 다이아몬드가 80파운드(500만캐럿 이상), 루비와 에메랄드가 각 100파운드(각 650만캐럿 이상), 진주가 600파운드, 그 외 각종 보석이 무진장했다고 하니 그 당시 무굴 제국이 굉장히 부유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종 무굴 제국의 부유함은 프랑스와 페르시아를 합한 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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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아들로 계승한 5대 샤 자한(샤 자한 1세, 본명 샤하붓딘 무함마드 후람, 재위 1627~1658)도 ' 세계의 왕'이란 칭호를 받을만큼 나름대로 훌륭한 군주였다. 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영토 확장을 계속해 무굴 제국을 당대 최대의 제국으로 넓힌 것도 업적. 샤 자한 시대의 강역,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칸다하르와 카불도 당시 무굴 제국의 영역이었다. 칸다하르는 끝내 샤자한 후반기에 페르시아에게 뺐기고 말지만... 3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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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골콘다와 비자푸르도 샤자한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다. 이 두 국가는 이후 아우랑제브가 치열한 전쟁 끝에 합 병해버린다. 당시 무굴 제국의 보병은 90만 명이 넘었고, 기병은 18만 5천 명에 이르렀으며, 1년 세입은 악바르 시절의 2배가 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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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 시절의 1년 세입이 영국 파운드화로 175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샤자한 시절의 1년 세입은 377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고 한다. 알람기르의 시절에는 3860만 파운드 이상이다! 당시 무굴 제국은 오스만, 사파비, 청나라와 더불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대국 중 하나였다.(프랑스, 스페인도 당시 강대국 대열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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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지막지한 애처가였던지라 셋째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국력을 소진시켜 가면서 그 유명한 무덤 타지마할을 지어버렸다.[23] 지금이야 인도의 관광수입을 높이는 세계유산으로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받지만 당시 건설을 위해 동원되고 희생당한 백성들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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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자한 당시 연 세입은 3억 180만 루피 정도였는데, 타지마할 공사에 22년 동안 총 32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연간 약 145만 루피 정도가 들어간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붉은 궁성에 디와니앰과 디와니하스를 지었으며,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짓는다든지 하는 온갖 계획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참고로 붉은 궁성 공사에는 총 60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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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기

결국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마흔 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우랑제브 역시 뭄타즈 마할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사실 어머니 장례식한다고 백성들 등골 빼먹는 격이니 나름대로 쿠데타의 명분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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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6대 황제가 된 젊은 아우랑제브 황제(1618~1707, 재위 1659~1707)는 꽤나 야심만만하고 호전적인 군주였던지라 즉위 직후 바로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때 계획했던 아그라에서 델리로의 천도를 완수했으며, 그 결과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스리랑카를 제외한 남인도까지 거의 다 밀어버린 것으로 판단할 정도. "무굴의 영역은 카불에서 코모린 곶(지금의 타밀나두 주 카니아쿠마리)까지"라는 이야기가 종종 불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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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토 면적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 반대로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은 퇴보를 걷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재위 20년을 넘기면서 이슬람빠였던 그가 힌두교도, 시크교도 국민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 그러나 그는 오로지 영토를 제일 크게 넓혔다는 이유만으로 무굴 제국 황제들 중 제일 유명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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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24] 긴 재위(48년) 내내 팽창정책을 구사했으나 내치에서 퇴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죽고 난 직후 태어난 청나라의 건륭제나 동시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우랑제브 시대의 온갖 병크는 결국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아우랑제브의 강압에 반발한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을 맞았으며, 시크교 역시 그들의 구루가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이래 무굴 제국에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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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가 분노해 남부 고원의 마라타 게릴라들을 진압하자, 이번엔 시크교도들이 많은 북부가 그들의 반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우랑제브는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채 데칸고원에서 전사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국정 역시 극심한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25] 결국 잘했던 20년보다 말아먹은 30년이 더 부각되는 안습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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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기

아우랑제브가 후사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세 명의 아들들이 서로 황위를 차지하려 다투다가인도판 왕자의 난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알람이 형제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로 즉위한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의 병크로 인해 터진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는 마라타 동맹과 라지푸트의 저항을 잠시 잠재우고 시크교도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무굴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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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아버지 아우랑제브와 달리 힌두 귀족들과 라자들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취하여 이교도들의 무굴제국 교화에 많은 신경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바하두르 샤 1세는 즉위할 때부터 이미 나이가 63세의 고령이었기에 제국을 오랫동안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재위 5년 만에 사망한다.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한 뒤 황위를 둘러싼 암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제국의 쇠락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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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분쟁 속에서 황제들이 잇따라 교체 되면서 궁정 귀족들의 세력은 날로만 커져간다. 이러한 황위 분쟁은 1719년 13대 황제 무함마드 샤가 즉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된다. 하지만 이미 무굴 제국이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제국 내 여러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한다. 30년의 혼란 속에서 무굴은 점차 약해졌고, 1738년에 마라타 동맹이 델리를 공격하여 말와 지역을 뺏기게 된다. 거기다 1739년에는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기계 나디르 샤가 델리 근처에서 무함마드 샤의 무굴 제국군을 대파하고, 델리로 입성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뒤, 무굴 제국은 실질적으로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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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인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 수도인 델리밖에 없는, 그야말로 동주나 신성로마제국, 후삼국시대 후기의 신라 같은 처지가 되었고, 인도 각지는 마라타 동맹 등 힌두계 왕국들과 이슬람계 술탄국인 마이소르 왕국[27],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이 나누어 접수한다. 마라타 동맹과 마이소르 왕국은 둘 다 영국에게 대항하였으나 실패하고 투항하고 만다. 자세한 건 마라타 동맹과 마이소르 왕국 문서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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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틈을 노린 영국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7년 전쟁의 인도 전역)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이래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소왕국들을 회유·정복하면서 인도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영국의 꼭두각시가 된 18세기, 19세기 사이에도 무굴 제국은 명목상으로나마 백여 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지만, 제20대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세포이 항쟁을 뒤에서 지원하자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하여 추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굴 제국을 폐지시켰다(1857년). 그렇게 인도 최후의 왕조인 무굴 제국은 330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무굴 제국을 없애고 나머지 남인도 및 스리랑카, 심지어 버마까지 병합한 영국은 전 인도를 아우르는 단일 식민 통치 기구인 인도 제국을 1877년 수립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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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굴제국 문화

무굴 제국 시기 인도의 문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에 형성된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은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 무굴 제국 시대는 이전 굽타왕조 이후 북인도 문화의 제 2의 정통 시대라 볼 수가 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의 힌두교 문화와 튀르크 – 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티무르의 후손들의 궁전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온 바부르는 인도에 정착한 후 당시 다양한 인종과 신앙 속에서 제각기 발전해 온 인도 문화를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새롭게 정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무굴 제국민들은 건축분야에서 아주 돋보였는데, 그들은 수많은 성과 왕궁, 문, 공공건물, 모스크, 저수 탱크 등을 세운다. 바부르는 특히나 정원을 좋아하여 아그라와 라호르 지역에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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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원들 가운데 카슈미르의 니샤트 바그, 라호르의 샬리마르, 펀자브의 핀조레 정원 등은 오늘날에도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성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은 악바르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악바르 때에는 붉은 사람으로 만들어진 유명한 아그라 성과 파테푸르시크리의 성, 그리고 샤 자한 때 이르러 완성된 델리의 붉은 요새는 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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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설에 따르면 16세기말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해서 그의 손자인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샤 자한은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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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는 자신의 라지푸트족 출신의 후궁들을 위하여 구자라트 양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페르시아의 양식을 본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양식은 후에 무굴 제국의 중요한 건축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샤자한 때에는 섬세한 힌두 장식과 조형미가 더해져서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이슬람 건축물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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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대표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타지마할이다. 하지만 위에 샤자한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는 무척이나 돈이 많이 들어가기도 했거니와 백성들의 피로감도 상당하다는 부정적 모습들도 보여졌다. 자한기르와 샤 자한 시기에는 이러한 건축물들 말고도 다른 부분에서도 두각을 보였는데, 이들은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에 관심이 많았고 덕분에 많은 문학작품들과 역사서 또한 페르시아어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다.

 

그 외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힌두 작품들도 이들 언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페르시아의 천문학과 철학을 받아들여 무굴 제국 내의 학문과 접합시키기도 하였다. 이 외에 예술 분야, 의복, 예절 등에서도 페르시아의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공예품들은 일반적인 백성들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들의 사치품들이 발달해 나갔다. 주로 금, 은, 보석 등으로 장식한 무기와 장신구, 섬세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질 좋고 화려한 비단과 벵골 지방의 고급 면직물도 이들의 사치품이었다. 음악에서도 음의 높낮이와 빠르기가 강조되었는데, 인도의 전통악기로 알려져 있는 시타르와 타블라도 이것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복으로는 페르시아의 스카프, 파자마 등이 유행하였으며, 인도의 전통음식들과 서아시아의 음식들이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음식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8일차 1월14일(일) ( 아그라 --> 델리 )

아침 6시에 기상, 7시 아침공양, 8시 델리로 6시간 이동 , 델리공항 출국 수속 , 19시40분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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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차 1월15일(월) ( 델리 --> 인천 --> 동대구 )

아침 6시에 인천 도착 , 6시42분 동대구발 K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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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스님, 직지사 불교대학원 여러분들, 그리고 대휴사 신도 여러분들 정말 특별한 인연이 되어 인도 불교성지 순례를 같이 하게 되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기도드리고 하는데 방해나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축원 해드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나 , 같이 여행간 사람들은 서로서로 챙겨 주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습니다. 모두 성불을 이룬 듯 합니다. 귀국 후 모두들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

 

중간에 편찬하시던 할머니 그리고 부회장님 또 모든 다른 분들 모두 염려가 됩니다 .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만나 뵙게 되면 반가워 인사드리겠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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