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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관 스님과 함께 한 인도 성지순례
      직지사 토요명상법회 모임은 지난 12월 7일부터 12월 16일까지 10일간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이번 성지순례에는 정관 스님, 강병직 직지사 신도회장, 김정선 직지사 토요명상법회 모임 총무 등 16명의 불교 신도들과 조원재 대승마야투어 부장과 현지 가이드 가후랑 등이 참여했다.     첫날 오전 6시 20분 김천시예술회관 주차장에서 집결한 이들 순례자들은 오전 10시 30분 경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여행사 가이드와 첫 인사를 하고 인도행 비행기 탑승 절차가 시작됐다.     인천 공항에서 수화물 운송을 위한 절차를 마친 일행은 탑승권을 발급 받고 12시 45분 발 항공기에 12시 15분 탑승하여 21시 45분경에 인도 델리에 도착했다.     델리(인도)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여행사에서 미리 준비한 버스로 이동하여 탑승하여 인도에서 첫 날밤을 보낼 호텔에 투숙하여 저녁 식사 없이 컵라면으로 대신하고 인도 성지순례 첫 여정을 맞았다.     이번 인도 성지순례는 정관 스님이 직접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순례 장소와 경전 내용이 서로 연상되도록 편집한 경전을 여행자 일행들에게 나눠주고 이것을 가지고 함께 독송하며 성지순례에 임하여 순례의 의미를 더 했으며 더욱 깊은 신심을 심는 계기를 마련했다.     성지순례 일정은 새벽 4시 모닝콜을 하는 이른 시간에 기상하여 아침을 일찍 챙겨 먹고 움직이는 일정으로 하여 움직였다. 왜냐하면 이른 시간에 움직이지 않으면 인도 특유의 다양한 운송 수단과 사람, 소, 개, 등 가축 등으로 혼란스러운 도로를 달려야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탄생, 성도, 전법, 열반 등 4대 성지가 있는 거룩한 땅 인도 성지 순례에 대한 기대를 품고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이른 새벽에 기상하고 이른 아침 식사를 챙기고 델리 공항에서 국내선 항공기에 탑승하여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녹야원과 영불탑 및 박물관을 돌아보며 인도에서의 첫 성지를 순례하며 각자가 감동의 눈물의 흘렸다.       이번 성지순례는 떠나오지 전 마지막 4끼를 제외하고는 한국전용 요리사가 함께 따라 다니며 요리를 하여 주어 현지식과 한국식 음식이 고루 맛 볼 수 있어 음식에는 별 문제 없이 여행할 수 있어서 여행에 있어 음식으로 오는 불편은 줄일 수 있었다.     성지순례를 통하여 성지를 둘러보며 부처님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쫓아가는 시간 여행도 순례자들에게는 큰 의미와 감동을 주었지만, 짜이, 난 등의 현지 토속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와 인도 현지 운송수단 자전거 끽사를 타보는 경험과 인도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접하고 묘한 전율과 문화를 체험하기도 했다.     금강경에서 항하의 모래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갠지스강에서의 가트 순례와 아르띠뿌자 등의 인도 현지인들의 힌두의식을 관람하였으며, 인도인들의 갠지스강가에서 망자를 화장하는 모습을 직접 체험했다.     일정 3일차 12월 9일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로 이동 하여 마하보디사원에서 7선처 순례, 수자타 스투파 순례를 하였으며, 일정 4일차 12월 10일 보드가야에서 라지기르로 이동하여 영축산, 죽림정사, 빔비사라와 감옥터, 나란다 대학터 순례를 했다. 일정 5일차 파트나에서 바이살리로 이동하여 사리탑 유적, 대림정사터, 원숭이 연못, 아쇼카왕 석주 등을 순례하고 케사리아로 이동항여 케사리아 스투파 순례을 하였으며, 쿠시나가르로 이동하여 열반당 다비장을 순례 했다.     일정 6일차 12월 12일 쿠시나가르에서 룸비니로 이동하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 네팔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에서 마야데비사원, 구룡못, 아쇼카왕 석주 등을 순례했으며, 일정 7일차 12월 13일 네팔에서 쉬리바스티로 이동하기 위하여 국경을 다시 넘어 인도로 가서 부처님께서 24 안거를 보내셨다는 기원정사, 수닷타장자 스투파, 앙굴리마라 스투파 등을 순례했다.     8일차 12월 14일 쉬라바스티에서 아그라로 이동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을 순례와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 시내문화 탐방이 있었다.     9일차 12월 15일 아르라에서 약 4시간 소요되어 델리로 이동하고 델리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오후 7시 40분 출발 항공기에 탑승하고, 10일차 12월 16일 5시 5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도 성지순례 일정을 마치고 김천으로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정관 스님은 성지 순례를 마무리하는 법문을 통하여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 가며 느꼈던 감흥을 오랫동안 간직하며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 부처님께서 마지막 하신 말씀인 방일하지 말 것을 재차 강조하며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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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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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Ⅲ
    아침 4시에 기상, 5시 아침공양, 6시 라지기르로 버스로 약 2시간 이동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 죽림정사, 1시간 이동 , 나란다 대학, 4시간이동 바이샬리 영축산에서 기도하는 모습  기도후 단체사진 , 안개가 짙다 11. 영축산 영축산(靈鷲山)은 붓다가 법화경의 꽃을 피우던 정상 부근의 바위가 마치 독수리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불교의 저 유명한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따서 무리에게 보인다)’이라는 화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하루는 붓다가 영축산 산상법회에서 범왕(梵王)이 공양한 연꽃을 대중에게 들어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통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제자 가섭(迦葉)만이 미소를 지었다. 즉,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쓰이는 ‘염화시중’은 훗날 선(禪) 수행의 중요한 화두가 된다. 붓다는 영축산에 올라 많은 중생을 해탈의 길로 안내했다. 그는 세상을 욕망과 증오, 어리석음으로 불타는 화택(火宅)에 비유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괴로움과 즐거움에 집착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집착을 놓을 때 비로소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영축산 정상에 조성된 설법터에는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꽃과 향을 피우며 연신 절을 올렸다. 불교 성지 어디엘 가도 만날 수 있는 어진 중생의 모습이다. 영축산은 당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독수리밥이 되기 위해 찾아들던 곳이기도 하다. 붓다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그 노인들에게도 열심히 법을 전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는 그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아난 동굴 12. 빔비사라왕 감옥터 13. 죽림정사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인 다자그리하(王舍城이라고도함) 북방에 있는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에 최초로 생긴 불교사원,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죽원가람(竹園伽籃)이라고도 한다. 코살라국 사위성(舍衛城)의 기원정사(祈園情舍)와 함게 불교 최초의 2대가람(二大伽濫)으로 불린다. 석가모니가 생존해 있을 때 자주 이곳에 머물면서 설법한 불교 포교의 중심지였다.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 의하면 가란타죽림은 가란타(迦蘭陀 Kalandaka)장자의 소유로서 왕사성의 여러 동산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가란타 장자는 본래 외도(外道)를 숭배햇으나 뒤에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불교로 개종하면서 이 죽림을 승단에 기증했다. 이 죽림에 당시의 마가다 국왕인 빔비사라 왕이 가람을 지어서 정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 과 <사분율 四分律> 에 의하면 이 죽림도 빔비사라 왕이 보시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 성지를 가던 꼭 어디에선가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이 몰려 온다. 나는 죽림정사를 순례하고 나오는중에 구걸하는 어느 어린 여자아이의 눈빛을 잊을수가 없다. 너무나 애절하게 좀 보태달라는 거의 눈빛은 살고자하는 너무나 애잔한 표정이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 그 애에게 1달러를 건네 주니 똑 같이 생긴 다른 여자아이도 같은 표정으로 구걸을 한다. 그래서 그 애에게도 1달러를 몰래 건네 주니 고마워서 웃고 고맙다며 내 손을 만지며 계속 버스까지 다라와 고맙다고 한다. 그 애들 둘다 머리를 쓰담아 주고 버스에 올랐는데 귀국하는 날가지 귀국한 지금 가지도 게들의 눈빛을 잊을수 없다 . 저 불쌍한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리요. 부처님 ! 부처님은 어떻게 저리 불쌍한 이들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 것입니까 ? 그 애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이 마음은 성지를 다니는 곳곳 늘 똑 같은 현실이며 그 느낌이다. 14. 나란다 대학터 불교최대의 대학 나란다 인도 Nalanda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이곳 출신인 사리불과 목건련에 의해 인연의 뿌리가 내려졌고 그후 승단이 형성되면서 종합수도장으로 성장하여 세계 최초, 최대의 불교 대학으로 교육과 사원의 기능을 같이한 곳이었다. 나란다는 길이 11Km, 폭5km로 1만명의 학인 스님과 1천 500명의 교수 스님들이 살았다고 하며, 5세기 굽타 왕조 시대에 설립되어 1,199년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될 때까지 1,600여 년 동안 인도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과 태국,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이 몰려들어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당대(唐代)에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 스님도 이곳에서 5년간 공부하였고 673년 이곳에 수학했던 의정 스님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이하면, 의정스님이 인도를 방문한 서기 671년 이전에 이미 4명의 신라스님들이 이곳 나란다에 와서 수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낯선 땅 수십만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건 구도의 길을 걸러 이곳 나란다 대학에서 수학했던 우리나라 신라스님들의 이름은 혜업(慧業), 현태(玄太), 현각(玄恪), 그리고 아라야발마라는 이름의 스님이다. 나란다의 찬란한 빛이 파괴된 것은 이슬람의 침공 때문이었다. 1199년 무하마드는 불교사원을 무차별 파괴하였고 스님들은 그들의 만행 앞에 처참하게 죽어갔다.  나란다 불교대학의 거대한 유적은 지금 10분의 1정도 발굴하였고 기숙사를 겸한 사원터 14개소가 드러났다. 유적지 한켠에 부처님 10대 제자중 지혜 제일로 꼽히는 사리불 존자의 사리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으며 그 조각상들도 그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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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5
  •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 법진 이상호] Ⅱ
    아침 3시반에 기상, 4시반 아침공양, 5시반시 보드가야로 이동 버스로 약 6시간 이동 수자타 마을 , 마하보디사원 순례 (보리수, 마하보디 탑, 금강좌, 7선처) 8. 수자타 탑 수자타는 붓다에게 유미죽을 제공하여 빈사상태에 있던 붓다의 기력을 회복하게 하여 깨달음을 얻게 한 여인이다. 그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스투파이며 나이란자라강 옆 수자타 마을안에 있다. 부처님께서 전정각산에서 고행 하신 후 이 강을 건너 보리수 아래로 향하셨다고 한다. 9. 전 정각산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바로 전 정각산으로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셨다는 산이다. 전정각산(현지 사람들은 마하칼라 산 이라 부름) 수자타의 공양을 받아들인 것을 오해하여 수행하던 다섯 도반들 모두 바라나시로 떠나버린 후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고자 찾아 왔다는 장소(깨달음을 얻기 전의 산이라 해서 전 정각산이라함)   10. 마하보디 사원 이렇게 하여 마하보디사에 이르렀다. 내가 본래부터 원하는 곳에 왔으니 너무나 기쁘다. 내 어리석은 뜻이나마 대략 엮어서 오언시를 지었다. 1,300여 년 전 어느 날 혜초스님이 어렵고도 힘든 길을 걸어서 몽매에도 그리던 보드가야 (Bodhgaya)에 도착하여,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얻으신 보리수 아래의 금강보좌 앞에서 벅찬 가슴으로 읊으신 시를 떠올려 본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 하리오. 다만 멀고 험한 길 근심되지만 업보의 바람 휘몰아침도 두렵지 않네. 여덟 탑은 참으로 보기 어려우니 어지러이 오랜 세월에 다 타 버렸네. 어찌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 오늘 아침 두 눈으로 똑똑히 보누나.” ( 왕오천축국전 중에서)   우리가 마하보디사(大菩提寺)을 순례하는 날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라마께서 대보리수사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참 행운이다 좋은 느낌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도 친견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가 방문 하는 날 오셨다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버스로 가까이 가는 것도 통제가 되어 어떻게 할까 하다가 통제가 풀렸다고 해서 가까이 버스로 갈수 있어 다행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각국의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사원 내에는 맨발로 입장이 가능 한지라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 놓고 맨발로 수많은 외국 스님들과 참배객들의 뒤를 따른다. 대보리사탑을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당당한 위용과 이슬람의 파괴에도 주민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천년 후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니 너무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이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탑을 만들 수 있었을까 ? 여기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구나 생각하니 부처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보드가야의 넓은 도량 가운데에 위용도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마하보디사와 수많은 봉헌탑과 보리수와 반얀나무들, 그 사이사이 공터마다 빈틈없이 앉아 법회를 열고 있는 인도, 스리랑카, 티베트, 네팔, 태국, 미얀마 등의 스님들의 진언과 염불과 독경소리를 들으며, 끝도 없는 줄을 따라 드디어 마하보디사의 법당에 들어선다. 높은 연꽃대좌 위에서 황금빛 가사를 걸치시고 항마인(降摩印)을 짓고 계시는 부처님께 법성스님과 함께 따라 같이 간 일행 모두 기도를 올리고 엎드려 삼배를 올린다. 법성스님께서 같이 간 우리들을 위해 축원을 더해 주시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감사하다.   대보리수 탑 내 법당의 부처님 상 마하보디사원을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모습법성스님과 일행들 기도하는 모습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후 첫발 “불족적” 법당을 물러나와 스님을 따라 사원의 왼쪽 벽 길을 천천히 걸어 탑돌이를 한다. 사원 뒤편에 우람하게 서 있는 보리수와 불족적 앞 공터에 스님에 따라 기도를 하고 좌정하여 1시간 가까이선정에 드니 위에서 부처님의 생생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한 때, 중생들은 근기가 낮고 탐진치와 사견과 교만에 가득하여 부처님의 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시어 법의 설하심을 그만두시고 바로 열반에 들고자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부처님의 마음을 간파한 제석천왕과 범천왕의 세 번에 걸친 간곡한 설법요청을 받아들여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깨달은 바를 설하시게 됨으로써, 이 세상에 부처님의 법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우리들도 오늘 같은 숙생의 인연으로 여기에 이르러 부처님의 모습을 뵙게 되고, 생생한 법음을 듣게 된 것이다.  보드가야(Bodhgaya)는 비하르(Bihar)주 가야(Gaya)시의 남쪽 약 11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카필바스투 성을 출가한 고타마 싯달타가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수행을 위해 찾아든 곳으로, 당시 보드가야 반대편 니련선하(尼連禪河) 건너의 고행림(苦行林)에는 약 2만여명의 수행자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고행과 단식이 열반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됨을 알게 된 싯달타는 이러한 방법을 중지하기로 결심하고, 니련선하 강가에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깎은 채 숲 속에 앉아 선정에 들게 되었고, 우루빌라 성주의 딸 수자타가 주는 유미죽(乳味粥)을 공양 받고 기력을 회복하신후 32상의 수려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싯달타의 모습을 지켜본 교진여 등 다섯 동료 수행자들은 실망하고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떠나버리게 된다. 혼자 남게 된 싯달타는 전정각산(前正覺山)에 올라 열반의 길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산신들은 보드가야의 금강좌(金剛座)에 올라 성도하기를 권하였으며, 이에 보드가야의 금강좌 필발라(Pipal)나무 그늘 아래에 동쪽으로 자리를 정하고,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하면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선정에 든다.  드디어 음력 12월7일, 욕계(欲界)의 모든 유혹에서 벗어난 싯달타는 또다시 깊은 선정에 들게 되는데, 초선으로부터 4선을 거친 후 천안통(天眼通)과 숙명통(宿命通)을 얻게 되고, 이로써 스스로의 지혜의 눈으로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추구하게 되었고, 또한 생사의 고통의 원인인 무명(無明)이 근본이 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간파하게 된다. 그리하여 12월8일 새벽, 샛별을 보는 순간 무명의 소멸과 함께 홀연 깨달음을 얻어 위없는 정각(正覺)을 이루시어 붓다가 되신다.> 삼보디(Sambodhi) 또는 마하보디라고 불리는 보리사(大菩提寺)는 최초 B.C. 250년경 아쇼카왕에 의해 금강좌(金剛座) 위에 4개의 석주로 지탱된 닫집으로 건립되어 ‘금강좌사원’으로 명명되었다가, A.D. 2세기 혹은 5세기경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이후 이슬람족의 침략과 힌두교의 영향으로 땅속에 묻힌 채 오랜 세월 그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881년 컨닝햄에 의해 완전히 발굴됨으로써 사방 15m의 정방형 기단 위에 52m의 높이로 세워져 있었던 대사원의 위용이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되었다. 마하보디사의 발굴자인 컨닝햄에 의하면, 원래 금강좌 위에 아쇼카왕이 건립한 사원이 있었고, 이곳 현재의 사원 역시 그곳에 증축된 탓으로 실제 금강좌 자리는 사원 안에 모셔져 있었다고 하며, 사원 담장 밖 보리수 아래에 조성된 현재의 금강좌는 굽타왕조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이곳의 거듭된 중수로 금강좌 기단부에 새겨졌던 열 가지 형상들과 조각은 해체되고, 좌대의 일부분만이 현재 이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사원의 동쪽에는 중각(重閣)이 있으며, 사원의 정문 좌우에는 관세음보살님과 미륵보살님의 상이 모셔져 있다. 사원의 벽과 첨탑의 벽면에는 수많은 감실과 그 속에 황금 불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일대기인 본생담에 근거한 무수한 조각들의 섬세함과 다양한 모습들이 순례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사원 법당에 모셔져 있는 항마인 모습의 불상은 13세기경의 작품으로,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원래 대좌의 높이 4척2촌, 넓이 1장2척5촌, 불상의 높이 1장1척5촌에 양 무릎의 거리가 8척8촌, 양 어깨의 넓이가 6척2촌의 대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하보디사의 서쪽 담장 곁에 자리하고 있는 25m 높이의 보리수는 원래 필팔(Pilpal)나무였으나, 부처님의 깨달음 이후 보리수(菩提樹)로 불리어지게 되었고, 대보리수(大菩提樹:Mahabodhi Tree)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의 이곳 보리수는 원래 있었던 보리수의 손자 격에 해당되는 나무로, B.C. 3세기경 아쇼카왕의 딸 상가미타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서 보리수의 묘목을 옮겨 심은 것이었는데, 보드가야의 보리수가 이교도들의 박해로 가지가 잘리고 훼손되자 다시 스리랑카에 있던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보리수를 둘러싸고 있는 기단부의 오른쪽 아래에 부처님의 두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佛足石)가 놓여져 있다. 길이 약 90cm의 발바닥 형상에는 애초 법륜과 물고기, 챠크라 등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참배객들이 보리수 아래에서 합장하여 머리를 숙이고,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티베트 여인의 모습도 보인다. 불족석과 금강보좌를 향하여 합장한 채 진언을 외우고, 사원의 벽에 이마를 붙이고 기도를 하고 있는 순례객들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7선처(七禪處) ●1선처 : 첫째 주, 화엄경을 설하신 보리도량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서는 1주일간 금강좌에만 앉아 계신 채 깨달음의 법 12인연(十二因緣)을 쉼 없이 관하시고, 모든 법이 인연 따라 생기고 소멸하는 우주의 이치를 완전히 파악하셨다. 그리고 선정 속에 머무시는 동안 시방세계의 모든 불·보살들이 모인 가운데 법회를 열어 우주의 진리를 꿰뚫는 ‘화엄경(Avatamsaka-sutra)'을 설하시게 되는데, 이곳 금강좌의 보리도량에서는 80화엄 중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이하 6품을 설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60화엄에 따르면 世間淨眼品 이하 2품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함)   이어 이곳 보리도량 곁에 있는 보광명전(普廣明殿)에서도 화엄경의 많은 부분을 설하시게 되는데, 이런 연유로 부처님의 성도 후 화엄경을 설하신 최초 37일(21일)간을 화엄시(華嚴時)라 부르기도 한다.   ●2선처: 둘째 주, 보리수를 바라보았던 장소(靜眼 스투파) 첫 일주일을 보내신 부처님께서는 대보리사의 동북쪽에 위치한 언덕에 올라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깨달음을 이루신 보리수만을 그냥 뚫어지게 바라보시게 되는데, 현재 이곳에는 아니미샤 로차나(Animisha Locana:靜眼) 스투파라고 불리는 탑이 세워져있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7일 동안 보리수를 보는데 눈을 잠시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보리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안 스투파는 화엄경을 설하신 보광명전으로도 알려져 있다.   ●3선처 : 셋째 주, 경행처(經行處)의 18개의 연꽃대좌 보리수를 바라보며 일주일을 보내신 부처님께서는 다시 보리수 옆, 지금의 대보리사 북쪽담장 곁으로 옮겨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동서로 왕래하시며 경행(經行)을 하시게 된다. 그때 부처님께서 가벼운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땅에서 연꽃이 피어올라 부처님의 발을 받쳐드렸다고 하는데, 현재 이곳에는 18개의 연꽃대좌가 조성되어 있다. 순례객들이 ‘라타나칸타마 차이타’란 이름의 연꽃대좌 위에 올려놓은 노란 연꽃접시가 주위의 담장과 보리수를 장엄한 노랑색 꽃 사슬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4선처 : 넷째 주, 오색(五色) 광명을 발하신 곳 - 라트나그라하 사원 부처님께서 경행을 하신 곳의 북쪽에 또다시 일주일을 보내신 장소, 라트나그라하 사원이 있다. 이곳은 부처님의 성도 시 범천(Brahma)과 제석천(Indra)이 칠보로 장식된 집(堂)과 칠보좌(七寶座)를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곳으로, 부처님이 이곳에 머무실 때 몸에서 파랑, 노랑, 빨강, 오렌지 및 흰색의 오색광명이 피어올라, 그 아름답고 신비한 빛이 보리수를 한참동안이나 비추었다고 한다. 현재 불교계가 상요하고 있는 불교기(佛敎旗)는 당시의 오색광명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오색이 갖는 깊은 뜻은 불자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흰색은 깨끗한 마음으로 온갖 번뇌를 맑히는 청정(淸淨)을, 오렌지색은 수치스러움과 그릇된 길로의 유혹에서 잘 견디고 이기는 인욕(忍辱)을, 빨간색은 항상 쉬지 않고 수행에 힘쓰는 정진(精進)을 상징하며, 노란색은 찬란한 부처님의 몸빛과 같이 변하지 않는 굳은 마음(心)을, 파란색은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구하는 정근(精勤)을 또한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5선처 : 다섯째 주, 반얀(Banyan)나무 - 법구경을 설하신 곳 마하보디사로 가는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부처님께서 일주일 동안 선정에 잠겨 계시던 또 다른 장소가 있는데, 현재 반얀나무(또는 아자팔라 니그로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이다. 부처님께서 이곳에 좌정하고 계실 때 한 브라흐만이 찾아와서 법을 청하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은 ‘법구경’의 말씀을 설하셨다고 한다.   “연잎 위의 물과 같이 바늘 위의 겨자와 같이, 욕심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나는 브라흐만이라 부른다. 다툼 속에 있어도 다투지 않고 사나움 속에 있어도 성내지 않으며, 유취(有取) 속에 있어서 무취(無取)인 사람을 나는 브라흐만이라 부른다. 사람이 만일 이 세상에 있어서 혹은 짧고 혹은 길며, 혹은 거칠고 혹은 고우며 혹은 깨끗하고 혹은 깨끗하지 않는 것을 묻지 않고, 주어지지 않는 물건을 받지 않으면, 나를 그를 브라흐만이라 부른다. 사람의 멍에를 끊고 신의 멍에를 넘어, 모든 멍에의 속박을 떠나면 나는 그를 브라흐만이라 부른다. 브라흐만은 그의 출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으로 하여 되는 것이다.”   ●6선처 : 여섯째 주, 무칠린다(Mucalinda) 용왕 못 대보리사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이 연못에는 수많은 연꽃이 피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고, 연못 가운데에는 조그만 탑 속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당시 연못의 서쪽 기슭에서 7일간 선정에 들어 계시던 부처님 주위를 연못에 살고 있는 무칠린다라는 용왕이 일곱 바퀴 둘러싸고 머리를 펼쳐 안개와 비바람, 천둥번개를 막아주었으며, 이런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이제 모든 번뇌가 다하고, 나의 할 일은 마쳤다. 나고 죽음의 바다는 마르고 구원겁에 쌓아온 원행(願行)은 다 찼다. 그러나 내가 깨달아 얻은 법은 매우 깊고 어려워 오직 부처와 부처가 서로 증명할 뿐, 저 어둡고 혼탁한 인간들은 탐진치와 사견과 교만 등에 덮이고 막히어 복은 엷고 근성은 둔하고 지혜와 선근이 없어 나의 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내가 그들에게 법을 바로 설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미혹하여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요, 도리어 나를 비방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악도에 떨어져 모든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니, 나는 차라리 조용히 열반에 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때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제석천왕과 범천왕 등 모든 하늘은, 생사의 바다에 빠져 헤매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대자비의 법을 설해 주실 것을 세 번이나 간청하였으며, 이에 부처님께서 이 요청을 받아들이시고, 장소를 옮겨 또다시 7일 동안 선정에 드신 채 끝없는 법열을 받으셨다. (불본행집경, 잡아함경)   ●7선처 : 일곱째 주, 라자야타나(Rajayatana)나무 대보리사 남쪽에 있는 이곳은 부처님께서 6주째의 선정 다음에 다시 선정에 드신 장소이다. 이곳에서 선정에 드신 가운데 깨달음의 법을 듣고 깨칠 수 있는 사람들을 관찰, 6년 전의 스승인 아라라가리마와 우드라카라마푸트라를 천안으로 관찰하였으나,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같이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법을 설하고자 마음을 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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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3
  •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지난 1월 7일부터 15일까지 김천불교대학 인연으로 함께한 이상호 거사가 인도 불교성지 순례답사기를 전해와 1-2일차, 3일차, 4일차, 5-6일차, 7,8,9일차 별로 시리즈로 편집하여 기사화 한다.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2018. 01. 07 ~ 01. 15                                                                                                  법진  李 相 昊 순례 일자별 여정 1일차 1/7일(일) 경산--> 동대구--> 인천공항 --> 델리공항 --> 호텔 2일차 1/8일(월) (델리공항--> 바라나시 --> 사르나트--> Clarks Hotel) 7시에 기상, 8시 아침, 9시 델리공항으로 이동 , 국내선 비행기로 바라나시로 약 1시간 30분 이동 , 초전법륜지 사르나트로 이동, 겐지스강 관광 3일차 1월9일(화) (바라나시--> 보드가야--> Anand International Hotel) 3시반에 기상, 4시반 아침, 5시반시 보드가야로 6시간 이동 수자타마을, 마하보디사원 순례 (보리수, 마하보디탑, 금강좌, 7선처) 4일차 1월10일(수) (보드가야-->라지기르 -->나란다--> 바이샬리 ) 4시에 기상, 5시 아침, 6시 라지기르로 버스로 약 2시간 이동,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 죽림정사, 1시간 이동 , 나란다 대학, 4시간이동 바이샬리 5일차 1월11일(목) (바이샬리--> 케사리아-->쿠시나가르-->국경-->룸비니) 4시에 기상, 5시 아침, 6시 사리탑, 대림정사 , 쿠시나가르로 4시간반 이동 케사리아에서 발우탑, 쿠시나가르, 다비장 순례, 네팔로 5시간 이동 룸비니 6일차 1월12일(금) ( 네팔 룸비니 --> 국경 --> 쉬라바스타 --> 럭나우) 아침 5시에 기상, 6시 아침공양, 6시30분 마야데비사원 , 국경 쉬라바스티 수닷타 스투파, 앙굴리마라 스투파 , 기원정사 7일차 1월13일(토) ( 럭나우 --> 아그라 ) 아침 5시에 기상, 6시 아침공양, 6시30분 출발 아그라로 6시간 이동 , 아그라 시내 관광 (타지마할, 아그라성, 시내 관광) 8일차 1월14일(일) ( 아그라 --> 델리 ) 아침 6시에 기상, 7시 아침공양, 8시 델리로 6시간 이동 , 델리공항 출국 수속 , 19시40분 비행기 출국 9일차 1월15일(월) ( 델리 --> 인천 --> 동대구 ) 아침 6시에 인천 도착 입국 , 6시42분 동대구발 KTX  1일차 1월7일(일) (인천공항--> 델리공항 --> ITC Welcome Hotel) 경산--> 동대구--> 인천공항 --> 델리공항 --> 호텔 인도 여행가기전 친구 녀석들에게 인도가서 자아성찰을 좀 하고, 인간 좀 돼서 오겠다고 인도여행 간다는 것을 농담 삼아 자랑하니 친구 녀석들이 “니가 인간이 아니면 이 세상에 인간인 사람이 없다”라고 한다. 친구 놈들이 “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하는 소리 일까 ? 인간은 과연 무엇일까 ?”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준비하여 5시에 집을 나서 6시에 동대구에서 출발하여 인천 공항으로 가는 KTX열차에 몸을 싣고 설레는 마음으로 불교성지 순례를 떠났다. 공항역에 도착하니 8시50분 좀 일찍 도착하여 커피한잔 하고 있으니 김천에서 오시는 24명이 10시30분에 도착했다. 김천 특유의 사투리가 너무 정겨웠다. 잠시후 여행가이드의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출국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 24GATE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50분이 연착이 되어 13시35분에 탑승하여 출국하게 된다   인도에 다 와서 델리공항에 착륙이 약 25분간 지연이 된다는 방송에 인도 내리기전에 인도다움을 느껴본다. 인도로 가는 기내에서 나는 불교신자들이 순례하는 것보다, 우선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서 또 각 성지에 대해서 구석구석 보고알고 싶은 생각으로 예불도 잘 모르고 불경도 전혀 모르는데 순례하러 오신 순례단들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조심이 되었다. 그래도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고 부처님을 뵈러 간다는 마음은 같으리라. 비행기에서 설레인다. 부처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가야지 싶어 정리한 자료를 보지만 뒤돌아서면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특히 인도 지명, 사람이름은 금방 까먹어 버린다. 장장 9시 25분에 걸친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델리공항에 도착하니 공항 내에 설치되어 있는 부처님의 손이 우리를 반긴다. 공항 밖을 나오니 날씨는 염려 했던것 보다 춥지 않았으며, 공항주위에 먼지가 잔뜩 썪인 안개와 그 속의 많은 사람들 뭔가 정리가 되지 않은 듯한 사회 기반시설과 주위환경에 안개먼지(Fog)로 온 천지가 잘 보이지도 않고 뿌옇다. 전용 버스에 짐을 싣고 호텔로 이동 하는데 벌써 어두워져 주위는 잘 보이지 않으나 주변이 그렇게 밝지가 않다.   호텔로 이동중, 버스는 나쁘지 않음 호텔에 도착하니 너무 늦어 컵라면으로 야식 겸 저녁을 먹고 짐 풀고 내일 여정을 위해 씻고 잠자기 바쁘다. 인도 불교성지 순례의 첫날은 이동으로만 하루가 다갔다. 바르나시 공항에 있는 코끼리 상 바르나시 시내 풍경 2일차 1월8일(월) (델리공항--> 바라나시 --> 사르나트--> Clarks Hotel) 아침 7시에 기상, 8시 아침공양, 9시 델리공항으로 이동 , 국내선 비행기로 바라나시로 약 1시간 30분 이동 , 초전법륜지 사르나트로 이동, 갠지스강 관광   1. 바라나시 베나레스(바라나시의 영어식 지명)는 바라나강과 아시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서 바라나시라고 했단다. 바라나시의 역사는 기원전 1000년경 아리안족의 일부가 강가강 유역에 자리 잡으며 시작되었다. 지구상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 살아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다. 바라나시는 2000여년 간 인도의 학문과 문명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여러 국가들이 이 지역을 정복했고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가 모두 바라나시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꽃을 피웠다. 그리고 오늘날 바라나시는 가장 종교적인 도시이며 가장 인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우리 일행을 싣은 버스는 오후에 바라나시로 들어섰다. ‘ 이제 인도인들이 사는 모습을 재대로 보게 되었다. 분주히 다니는 많은 사람들, 하지만 옷 차림새나 집들은 너무 열악 했으며, 거리는 너무 지저분하고, 주위에는 온 천지 먼지투성이며 나무도 먼지를 폭 뒤집어 쓰고 있다. 내가 기대 했던 모습보다 너무 못 미쳤으며 티벳 보다도 못한 삶이다. 또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에게도 웃음이 없다.   7세기 중국의 구법승 현장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바라닐사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바라나시를 소개하고 있다. “…마을이 즐비하게 서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집마다 엄청난 부가 넘쳐나고 방마다 신기한 재화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세속에서는 학문을 익히는 데 힘쓰고 있다.…” 예로부터 바라나시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특히 바라나시는 옷감, 그 가운데서도 화려한 색의 실크로 유명했단다.   또한 세상의 모든 향기로운 것들을 다 섞어놓은 듯 한 향료가 가득한 도시이기도 했다. 귀한 옷감과 향료는 도시를 풍요롭게 했고 그 풍요를 기반으로 철학과 종교가 꽃을 피웠다. 수행자들이 모여들었음 또한 당연하다.   2. 사르다트 박물관 시간 관계상 사르타트 박물관을 먼저 보기로 했다. 바로 앞이 녹야원이다. 저 멀리 다메크 탑이 보인다   박물관 중앙 홀에 인도의 국가문장인 '4사자상'을 전시해놓았다. 박물관 안에는 많은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내에서 가장 유명한 부처님의 처음 설법하시는 모습을 형상화 한 초전법륜상이 설법인을 하고 아주 명쾌한 모습으로 계신다. 또 녹야원의 아소카 석주 상단에 있던 것으로 이 '4사자상'은 지금은 인도의 문장(紋章)이 되었고, 모든 지폐에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법정스님 설명으로 4사자상 밑에 4마리의 동물 사자(지혜 용맹), 코끼리(리더, 풍요, 자손번창, 카네스) 소, 말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사진 촬영 구역이라 내부의 사진을 찍을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3. 디메크 스투파(초전 법륜지 기념탑) 녹야원 내에 안 쪽에 있으며 녹야원 입구에 들어서면 멀리 거대한 대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펴신 초천법륜지임을 알리는 다메크스투파다.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석주모양의 이 대탑은 높이 34미터, 지름이 28미터에 달한다. 현재 남아있는 대답은 약 50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수차례의 재건과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실제로 대탑에서는 기원전 200년 경 마우리아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벽돌이 나오기도 해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해준다. 대탑의 표면을 장엄하고 있는 기하학 문양과 꽃무늬 역시 4~5세기 이 지역을 장악했던 굽타왕조의 것이다. 다메크스투파 주변으로는 수많은 건물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불상을 모셨을 사원터, 수행자들이 머물렀을 승원터, 탑을 세웠을 자리, 명상에 이용했을 수행터 등. 남아있는 기단의 모양과 건물의 배치된 모양을 통해 용도와 구모를 짐작해본다. 150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현장 스님의 기록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왕조의 흥망에 따라 번영하고 쇠퇴했을 녹야원 초전법륜지의 역사가 흩어진 벽돌기단의 흔적을 따라 서리서리 흐른다. 다메크스투파 앞에서 나는 잠시 부처님의 초전법륜을 듣기 위해 부처님 그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 본다. 깨달음을 얻은 후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가장 먼저 법을 펼 대상으로 옛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를 떠올리셨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수행자 웃다까라마뿟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 바라나시의 녹야원까지 오는 동안 이교도 수행자, 뱃사공을 만났지만 그들 모두 진리의 법과는 인연이 없었다. 눈앞에 부처님을 보고도 법을 청하지 않았음이다. 부처님께서 그토록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오시는 동안 단 한 명이라도 법을 청했다면 초전법륜지는 이곳 녹야원이 아닌 보드가야와 바라나시 사이의 그 어디 즈음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대탑 다메크스투파는 진리의 수레바퀴가 구른 최초의 순간, 그 역사적인 장소를 일깨우는 동시에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구하지 않고서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법의 수레바퀴는 세상 그 어는 곳에서라도 당당히 구를 것이라고. 이곳에서 부처님은 옛 도반이었던 다섯 수행자를 위해 법을 펴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환한 보름달이 뜰 무렵 진리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 다섯 수행자 가운데 꼰단냐가 처음으로 아라한과를 얻었다. 이후 닷새 동안 나머지 네 명의 수행자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 먼저 깨달은 이가 아직 깨닫지 못한 도반을 위해 바라나시 시내에서 탁발을 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그 첫해의 우기를 이곳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와 보내셨다. 그러는 동안 바라나시 부호의 아들이었던 야사를 비롯해 모두 55명의 청년들이 녹야원으로 찾아와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들은 부처님과 함께 우기를 보내며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 이로써 세상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해 모두 61명의 아라한이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곳 녹야원에서 함께 머물렀다. 60명의 아라한이 탄생한 곳. 녹야원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드가야의 우루벨라와 더불어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성스러운 깨달음의 땅이 되었다.   4. 다르마 라지크 스투파(진리의 왕 탑) 녹야원 내에 있으며 녹야원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큰 유적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퍼 (진리의 왕 탑)이다. 이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직경 31.5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의 기단부위만 남아 있다. 영국 식민시절인 1794년, 바라나시 지역의 지방 장관이 부처님 사리탑인 ‘다르마라지카’탑을 헐어 벽돌을 채취하여, 자신의 저택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그때,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새겨진 상자를 발견하고,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사리함과 안에 들어있던 대리석으로 만든 사리호는 관심이 있어서 보관하고, 사리호에 담긴 내용물, 즉 부처님 진신사리는 갠지스 강에 버렸다고 하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현재 그 사리함과 사리호는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정말 한편의 코미디와 같은 일이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과거를 처단할 수는 없으리라.   석가모니부처님과 다섯 수행자의 재회. 수행자 싯다르타가 고행을 버리고 타락했다며 떠나갔던 다섯 수행자들은 붓다가 된 싯다르타, ‘환한 얼굴빛과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 광채’에 휩싸인 옛 도반의 모습 앞에서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외면하자’고했던 다섯 수행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발우를 받아들고, 앉을 자리를 준비하고, 발 씻을 물을 가져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맞이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 .   다르마라지카 스투퍼 터 모습 초전법륜지 (디메크 스투파)에서 기도하고 나오면서 해가 서서히 질 무렵 다르마라지카 스투퍼 터(부처님의 진신사리 탑터)에서 같이 갔던 일행 모두 법성스님 따라 참선에 드니 너무나 감격스럽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법성스님 말씀대로 기가 샌 곳이어서 인지 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4. 차우칸티 스투파 ( 영불탑 : 부처님을 맞이 한 곳을 기념한 탑 ) 싯타르타의 수행자 꼰단냐, 왑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 이들은 싯다르타의 곁을 떠났다.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하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헤어진 다섯 수행자들은 바로 이곳 바라나시 인근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바라나시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러했듯 다섯 수행자 역시 숲에 머물렀다.   우리 일행이 녹야원을 나올때 벌써 해질무렵이라 문이 닫겨 있어 들어가 가가이서 보지 못 한게 아쉽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 북동쪽으로 10km여 떨어져 있다. 지금은 별다를 것 없는 인도의 시골 마을이지만 붓다의 첫 가르침이 울려 퍼진 이 특별한 불연의 장소는 한 때 불교성지로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인도 최초의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 대왕이 기원전 262년 불교로 개종한 후 이곳 사르나트의 녹야원이 초전법륜지임을 알리는 석주를 세웠다. 5세기에는 중국의 구법승 법현 스님, 7세기에는 현장 스님이 이곳을 찾아 불교성지로 번영한 사르나트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7세기 중엽 이곳을 순례한 현장 스님은 당시 사르나트에 1500여 명의 스님, 100미터 가까이 되는 높이의 불탑, 거대한 아쇼카석주 등과 함께 수 많은 불탑과 사원들이 즐비했다고 기록, 사르나트가 불교성지로 여전히 흥성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후 이슬람교가 확산되면서 도시의 건물들은 파괴되었고 불교는 급속히 쇠퇴했다. 급격한 쇠락의 결과는 8세기 이곳을 순례한 신라의 구법승 혜초 스님의 기록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혜초 스님은 ‘피라날사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나시를 기록하며 “이 나라 역시 황폐했다. 왕도 없다.…당간위에 사자상이 있다.”라고 전했다. 도시와 유적은 이미 파괴됐고 아쇼카왕의 석주만이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음이다. 파괴된 도시는 복구되지 못한 채 수백 년 세월을 방치되었고 오늘날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1835년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사르나트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물의 상당수는 지금도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5. 겐지스강 우리는 초전법륜지에서 부처님을 처음 만난 그 감동을 갔고 겐지스강으로 갔다 가는 길이 복잡해 버스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가는 길은 복잡하고 인파가 너무 복잡해서 일행을 따라가기도 힘이 든다. 도로에 온통 먼지투성이, 오물 쓰레기가 가득하며 강에 가까이 갈수록 나무장작을 많이 재 놓은 것 과 강가에서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니 이상한 묘한 기분이 든다. 인도 사람들이 평생 겐지스 강에 가서 목욕하고 죽어서 재로 겐지스에 뿌려지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겐지스에서 화장 못하면 평생 한번은 꼭 겐지스강을 가는게 소원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배를 타고 겐지스강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갔다. 강가의 가트에서는 힌두제사의식 아르띠뿌자도 몇군데에서 행하고 있으며 약간의 성스러움도 느껴진다. 제사를 행하는 브라만들의 모습이 절도가 있고 잘 연습된 것 같으며 매우 진지해 보인다. 좀 더 상류로 올라가 보니 약 스무 군데에서 화장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화장할 때 시체나 나무 타는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바로 뒤에는 게스트하우스도 보인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죽음과 삶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6. 항하사(恒河沙) 항하사(恒河沙)는 인도의 갠지스 강을 나타내는 단어인 항하(恒河)에서 비롯된 수의 단위를 나타 내는 명칭이다. 항사(恒沙)라고도 하며 무수히 많다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 항하사는 갠지스 강의 모든 모래를 합한 숫자라는 뜻으로, 수리적으로는 1052을 뜻한다고 한다. 금강경에서 나오는 항하사   7. 아르띠부자 ( 흰두교 제사 의식 Arti pooja)와 가트 아르띠 뿌자, '푸자' 혹은 '뿌자'라고 줄여서 부름. 성스러운 신들의 땅 바라나시에서는, 매일 밤 해질녘에 거대한 종교행사가 펼쳐진다. 보통 푸자 (Pooja) 라는게 힌두교의 제사의식이다. 그 중 아르띠 뿌자는 바라나시를 대표하는, 아주 유명하고 성스러운 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힌두교가 신성시하는 어머니의 젖줄같은 갠지스강과 강을 따라 ‘강가와 맞닿아 있는 계단’을 뜻하는 수많은 가트가 조성되어 있는 곳으로 가트의 화장터, 불타는 시신, 목욕하고 기도하는 신자들, 유람하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며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이 물에 목욕을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죄가 씻겨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죽은후 이곳에 재가 뿌려지면 윤회로부터 해탈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임박해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해마다 수많은 순례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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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2
  • 불심으로 가득한 7박 9일
    직지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김천불교대학은 부처님 생전 활동지인 인도 현지 답사를 통하여 부처님 생애를 체험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인도성지순례를 실시했다.   수정(법성)스님을 비롯한 대학원 1학년 주.야간반, 대휴사 신도 등이 참석하여 인도 성지순례가 7박 9일동안 진행됐다.   지난 7일 기대와 신앙심으로 김천문화회관 앞 새벽 6시 버스탑승으로 시작된 인도순례 일정이 15일 정오 김천문화회관에 버스가 도착하면서 7박 9일의 순례 일정이 모두 마무리 되었다.   첫날 인천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12시 45분 델리행 대한항공 여객기에 탑승하여 9시간의 승선의 지루함을 이겨내고 저녁 6시 30분경 델리에 도착한 일행은 호텔에서 투숙하고 2일차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향하는 국내선 항공기를 이용하는 연일 바쁜 일정이 소화되어 갔다.   이번 성지순례는 성지순례를 전문으로 하는 대승투어의 패키지를 통해 프로그램 된 순례 일정으로 7일(인천 델리), 8일(델리 바라나시), 9일(바라나시 보드가야), 10일(보드가야, 라지기르, 나란다, 바이살리), 11일(바리살리, 케사리아, 쿠시나가르, 룸비니-네팔), 12일(룸비니-네팔, 쉬라바스타-인도, 럭나우), 13일(럭나우, 아그라), 14일(아그라, 델리), 15일(인천공항, 김천) 등의 일정으로 진행됐다.   성지를 순례하는 동안 수정(법성) 스님은 7정례, 반야심경, 금강경 독송 및 개별 축원 등의 예불 의식을 빠짐없이 실시하여 부처님 제자로서의 예를 다하며, 김천불교대학 학생 및 신도에게 신심을 더욱 굳게 심어줬다.   7박 9일 동안 강행군 되는 성지순례이었지만 모두 부처님 성지 순례 감동의 마음으로 극복하고, 무사히 귀국했다.   인도 성지순례를 마친 이들은 소감을 통하여 ‘인도는 알 수 없는 나라이다. 부처님 나라에 이렇게 못 사는 사람이 많은지. 소가 많은 나라, 소가 대우 받는 나라이다. 개가 많은 나라이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이다’ 등의 각자가 느낌을 말하며 다음에 시간을 내어 다시 오고 싶은 나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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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15
  • 꿈의 클래식 축제, 잘츠부르그 페스티벌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꿈의 축제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페스티벌(Salzburger Festspiele / 영. SALZBURG FESTIVAL)이 2014년 7월 18일부터 8월 31일까지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그에서 열린다.   잘츠부르그 축제는 매년 공연되는 오스트리아의 국민연극 예더만(Jedermann)과 최고수준의 오페라를 비롯해 빈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등의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스타 연주자들이 꾸미는 클래식 축제다.   올해에도 빈필하모닉의 공연에서는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잘츠부르그 축제는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시인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에 의해 1920년 창설 되었다.   이후 잘츠부르그 출신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종신 상임 지휘자였던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이 1960-1989년까지 축제의 총감독을 맡게 되면서 베를린필과 빈필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 했다.   전통적으로 매년 7월과 8월에 열리는 잘츠부르그 축제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과 수상은 물론 이웃 나라 정상과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방문하면서 누가 VIP 인지 구분이 어려워 보통사람을 만나기가 더 어렵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축제 기간에는 모짜르트 생가가 있는 게테라이데 거리(Getreidegasse)와 지금은 이름이 바뀐 강 건너 카라얀 거리(Karajanstrasse)의 카라얀 생가까지, 몰려든 인파들로 인구 16만의 작은 도시 잘츠부르그는 클래식 열기에 휩싸인다.   축제 기간 잘츠부르그는 도시전체가 거대한 공연장으로 변신하고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방송 카메라와 기자들의 취재 경쟁 또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잘츠부르그 축제는 클래식 스타를 만들어내는 산실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소프라노 조수미도 카라얀의 추천으로 잘츠부르그 축제에 데뷔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잘츠부르그 축제의 공연 티켓은 정상 가격외에도 추가 후원금을 내는 전통이 있으며 티켓이 항상 조기 매진되면서 축제기간에는 공연장 입구에서 티켓을 구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클래식 매니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잘츠부르그 음악축제 http://www.salzburgerfestspiel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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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2
  • 빈 여름축제, 시청광장 필름 페스티벌
    오스트리아 빈 시청앞 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프란츠 벨스 뫼스트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 장면이 펼쳐진다.   광장에 모인 황혼의 노부부와 배낭을 맨 여행객들,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이들은 한손에 맥주잔을 들고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수 천명이 빈 시청 광장에 모여 오페라와 클래식 콘서트를 감상하며 한여름밤의 여유를 즐기는 것, 이것이 '빈 시청 필름 페스티발'의 진수다.   "빈 시청광장 필름 페스티발"은 세계적인 발레, 오페라, 연주회, POP 공연 실황을 녹화해 대형 화면으로 보여주는 문화 행사로 올해는 6월 28일 시작해 8월 31일 막을 내린다.   이행사는 빈 시민들 뿐만 아니라 빈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 경제적인 부담없이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올해의 주요 레파토리는 발레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오페라 리콜레토, 오델로, 피가로의 결혼, 토스카, 라보엠, POP 공연 폴 매카트니, 신디로퍼, 클래식 프란츠 뵐스 뫼스터 지휘의 빈필 오케스트라 공연, 랑랑 피아노 공연 등이다.   특별한 시간을 정해 놓지 않고 어두워지면 시작한다는 안내문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오스트리아 빈의 여름밤은 여유 그 자체다.   http://www.filmfestival-rathausplatz.at   http://www.wien-event.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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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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