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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10.1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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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교육너머’에서는 10월 24일(토) 오전 9시에 율곡동 주민센터 주차장에 모여 김천지역 동학혁명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김천은 조선시대 김산, 개령, 지례 세 개 현이 있었고, 무주, 추풍령, 상주, 성주, 선산등을 인근으로 하여 충청ㆍ전라도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소문이 가장 먼저 전달되는 길목이었다. 이곳에는 명문거족보다는 평민이나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사회변화에 신속하게 접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동학교도들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2대 교주 최시형이 이곳에 피신해 있었던 영향도 있었고,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간 존중과 평등사상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향이 있었을 듯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어모, 대항, 구성, 조마, 봉계 등 곳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했고, 그들은 감천을 건너 성주와 선산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또 어모 참나무골 편보언이 사재를 털어 김천 장터 여각(조선시대 각 연안의 포구에 자리잡고, 지방에서 오는 객상(客商)들을 위해 화물의 도매·위탁판매·보관·운송업 등과 금융업·여관업을 겸하던 상업기관) 중 하나를 빌려 도소(전라도는 치안과 개혁을 위한 일종의 자치기구 집강소가 관아에 설치되었는데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동학의 조직인 도소가 집강소 역할을 했다)를 설치하여 도집강(도소의 우두머리)이 되어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힘썼다.(채길순 경상북도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의 전개과정, 경상도 김천 동학농민혁명, 동학학회 엮음에서)

 

코로나19 때문에 아쉽게도 24일 탐방은 자차를 이용하여 한나절 동안 주로 구성과 조마를 거쳐 도소터가 있던 아랫장터와 동학교도 처형터였던 배다리 부근(현 폭포 주차장)을 돌아보려고 한다. 또한 구성 감호정 가는 길에, 동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인 방초정과 6.25전쟁 당시 민간인 피학살터였던 돌고개를 들러 볼 예정이다.

문의 : 010-8850-3207(김천교육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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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동학혁명의 발자취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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