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천년고찰 직지사, 호국성사 사명대사 헌향재 봉행

호국성사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시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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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9.2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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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직지사는 풍전등화의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신 사명대사를 기리고자 호국성사 사명당 헌향재를 봉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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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사명대사 헌향재에는 직지사 법보 운해 주지 스님, 직지사복지재단 대표이사 신산 법성 스님, 승려복지회 회장 웅산 법등 스님, 김천불교사암연합회 회장 적인 스님 및 각 지역 불교사암연합회장, 주윤식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장, 강병직 제8교구 신도회장, 김훈이 문화홍보실장 및 직지사 포교단 등이 참석한 가운데 23일 사명각에서 ‘사명대사 헌향재’가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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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향재는 개회선언, 사명각전 주위를 향로수를 뿌려 정화하는 의식인 청수, 나쁜 액운이 범접하지 않도록 하기위한 주향통서, 천년대향로 점향, 노전 스님 분향진언, 병향로, 향사, 주향통서 낭독, 분향진언, 주향공양, 헌향, 사명대사행장, 주지스님 인사, 헌시, 향나눔 순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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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총무국장 정관 스님은 호국성사 사명대사의 행장을 공포했다.

 

▣호국성사 사명대사 행장 

성사의 법명은 유정, 호는 사명 또는 송운, 종봉입니다. 1544년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1556년(13세) 유촌 황여헌에게 유학을 배우기 위해 황악산 아랫마을을 찾았고,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직지사로 출가해 신묵화상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561년(18세)에 승과의 선과에 합격하였고, 1573년(30세)에는 직지사 주지를 맡았습니다. 1586년(43세)에 옥천산 상동암에서 확철대오 하였습니다. 1592년(49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산 표훈사에서 안거하고 있던 성사는 왜적이 유점사를 약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적장을 만나 포로로 잡혀 있던 스님들과 백성들을 석방시켰습니다. 이후 조정의 근왕문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은 성사는 건봉사에서 150명의 승군을 모집하였습니다.

 

1593년(50세) 의승도대장 된 성사는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를 다졌고, 평양 탈환 후 서울로 진격하여 노원평 전투와 우관동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수락산 성사의 전투에서 전공을 포장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에 선조가 성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를 제수하였습니다.

 

1597년(54세) 가토 기요마사의 요청으로 다시 울산 서생포로 들어가 회담하였습니다. 이후 명나라 제독 유정과 함께 순천 예교 전투에 참전하고, 남해안 수비를 맡으며 부산성을 수축하였습니다.

 

1603년(60세) 전란의 파란이 잦아들자 성사는 유점사로 돌아가 스승 서산대사를 만났고, 일본군이 약탈했던 통도사 불사리를 되찾아 금강계단에 다시 안장하였습니다. 1604년(61세) 서산대사의 열반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왕의 부름을 받아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605년(62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잡혀갔던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였습니다. 임무를 마친 성사는 비로소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의 영전에 참배하였다. 1610년(67세)에 해인사에서 문도와 대중들에게 유훈을 남기고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좌탈입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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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사명대사는 나라가 사라질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왜구와 맞서 싸우셨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포로 3,000여 명을 이끌고 귀국하셨다. 오늘 사명대사의 행장을 기리는 헌향재를 봉행하는 까닭은 사명대사의 지혜와 자비정신을 본받아 민족 번영, 나아가서는 인류의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우리가 올린 향공양으로 인해, 자신의 한 몸 불살라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민족혼이 세세생생 계승되고 직지사 창건주 아도화상이 향으로 성국공주를 치유했듯이 모든 중생이 고통이 없길 간절하게 기도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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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직 제8교구 신도회장은 헌시를 통해 호국성사 사명대사의 호국정신과 위국충절의 뜻을 기리는 헌시를 낭독했다.

 

[추모시] 사명대사의 석장(石藏)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니, 

스님은 중생을 구하고자 

석장을 들고서 분연히 일어서야 했다. 

백성의 피로 물든 산야, 

백성의 눈물로 불어난 하천 

개미 한 마리조차도 살생을 피하고자 

조심스레 짚고 다녔던 석장으로 

스님은 왜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출가사문이 살생을 일 삼아서 되겠느냐고 

혹자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갓난애는 죽은 어미의 마른 젖을 빨다가 울고, 

늙은 어미는 아들을 뒷산에 묻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아비규환의 세상을 

스님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지장보살이 지옥의 중생까지 구제하기 위해 육환장을 들었듯 

스님은 지옥도의 조선 반도를 구하기 위해 석장을 들었다. 

덧없는 인생은 꿈만 같은데 

전장( 특별)의 시름은 그칠 줄 모르니 

스님은 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쓸쓸히 흘러가는 하천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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