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1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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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을 수 없는 학생들의 눈빛에 봉사의 보람 느껴
    국제로타리3630지구 제16지역은 3년 전에 해당 지역 로타리 기부금과 이에 상응하는 사업 자금을 조성하여 시행하는 사업인 제16지역 지구보조금 사업을 위해 필리핀 현지를 방문하여 준공식을 축하했다.   벽성 조두천 국제로타리3630지구 제16지역 대표, 근용 김영배 국제로타리3630지구 총재(차차차기), 세명 윤세일 김천로타리클럽 회장, 운목 황금철 김천중앙로타리클럽 회장, 추계 박영덕 새김천로타리클럽 회장, 은채 우문향 김천직지로타리클럽 회장, 유선태 남김천로타리클럽 차기회장 등을 비롯한 로타리안과 필리핀 한인협회 부회장, 슈빅 필리핀 시장 후보 등과 수빅 카악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과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15일 필리핀 수빅 카악초등학교에서 국제로타리3630지구 제16지역 지구보조금사업 준공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개회선언, 내빈 소개 등의 순으로 진행되고 국민의례 및 로타리의식 행사는 생략하고 본 행사에 들어갔으며, 학생들에게 교복 및 학습문구 전달식, 현판식 및 기념촬영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진행된 프로그램은 국제로타리3630지구 제16지역 지구보조금사업 "필리핀 수빅 카왁초등학교 화장실 보수공사 준공식 및 학습부자재 전달식“으로 지구보조 980만원과 1000만원의 지역 상응 자금으로 조성되어 총1980만원의 사업이 실시되고 15일 준공을 이를 축하는 행사가 마련된 것이다.   이날 준공식에 참여한 로타리안들은 국제로타리3630지구 제16지역 지구보조금사업 준공을 기쁨과 함께 수해 받은 학교 학생들의 해맑은 눈동자에 더 큰 강동을 받으며 봉사의 보람을 느꼈다.   2월 14일부터 2월 18일까지 3박 5일의 일정으로 필리핀을 방문한 이들 일행은 첫날 19시에 김천을 출발, 22시 30분에 대구 공항을 출발하여 15일 1시 20분 필리핀 클락 공항에 도착하여 현지 로하스호텔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었다.   둘째 날 아침 7시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마치고 8시 집결하여 수빅 봉사활동 현장으로 출발하였으며, 현장에서 준공식을 하고 로타리클럽이 비용을 제공하고 현지에서 요리한 현지식으로 중식을 하고, 현지 한국인의 식당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했다.   셋째 날 요트 호싱 투어 및 열대과일 시식, 전신 마사지 체험, 넷째 날 대자연의 유황온천, 푸닝 노상온천으로 사륜구동차로 이동하며 현지 화산재가 만들어 놓은 절경감상을 하였으며, 화산지대 모래찜질, 노상온천 등을 즐겼으며, 현지 민속촌 관람 등의 순의 관광이 이어졌다.   다섯째 날 17일 현지 노상 무재한 삼겹살으로 저녁을 제공 받은 장소에서 10시까지 시간을 보내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1시 45분 발 비행기에 탑승하여 5시 55분 대구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8시 30분 경 김천에 도착하며 일정이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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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8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 경북지역단 해외연수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사 경북지역단은 ‘내리고 버리고 비우고 붓다로 살자’ 2019년 운영기조 실천을 실천하고 포교사 역량 강화 및 화합을 위한 해외연수를 실시했다.   이희철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사 경북지역단장을 비롯한 포교사, 도신 스님 등 23명은 12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일본불교성지순례 일정을 소화했다.   대구 국제공항 8시 35분에 출발하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 김천, 구미, 경산, 경주 등 각 지역의 포교사 등은 새벽 5시 30분 경 현지에서 출발하여 오전 7시 대구 공항에 도착하여 여행 전 첫 인사를 나누었다.   대구 공항을 출발한 여객선은 10시 30분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장송기 일본 현지 가이드와 인사를 나눈 후 안내에 따라 나라로 출발하여 법륭사로 이동 도중 일본식 부패 식당에서 일본에서 첫 식사 시간을 가졌다.   오후 1시 경 법륭사에 도착한 일행은 세계예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진 법륭사(호류지절) 참배를 마치고, 나라 사슴공원 안에 있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 도다이지의 정문인 대화엄사와 세계 최대 청동 부처님을 모신 동대사(도다이지)로 이동하여 참배 후 호반의 도시 오쓰로 이동 료칸 코모레비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제공하는 연회식을 즐기고 3일간 첫 여정을 풀고 코모레비에서 제공하는 온천욕을 즐겼다. 2일차, 오전 7시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 교토로 이동하여 동본원사(히사시 혼간지), 용안지(료안지), 삼십산간당(산쥬산겐도) 등을 참배하고 점심으로 현지 음식을 체험하고 천룡사 참배 후 대나무 숲 산책과 아라시야마 단풍을 만끽하고 저녁 시간에는 도돈부리, 난바, 돈키호테 등으로 유명한 오사카 시내 관광을 하고 한일관에서 한정식으로 저녁식사를 즐기고, 호텔로 이동하여 세라톤 미야코 호텔로 이동하여 2번째 여정을 풀었다.   3일차, 오전 7시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사천왕사(시텐노지)를 참배한 후 오사카 성 관광과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점심으로 샤브샤브를 즐기고 오후 1시 경 공항으로 이동하여 오후 5시 30분 간사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7시 경 대구국제공항에 도착하여 그동안의 여정의 마무리 인사를 한 후 각 지역별로 귀가 5시 30분의 일정에 올랐다.   이번 2박 3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일본 여행 경험이 많은 도신 스님과 현지 가이드(장송기)의 적절한 일정 배정과 상세하고 재미있는 현지 설명으로 더욱 유익한 관광이 되었으며, 포교사 역량 강화를 위한 개개인의 각오를 다지고 신심을 함양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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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04
  •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Ⅵ
    아침 5시에 기상, 6시 아침공양, 6시30분 출발 아그라로 6시간 이동 , 아그라 시내 관광 26. 아그라 시내 관광 아그라 요새 무굴제국 Mughal Empire(1526~1857)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북인도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조. 주요 영토는 인도 지역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발원지는 아프가니스탄이며, 초창기의 세력은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이다. 때문에 몇몇 서적에서는 이를 두고 제2차 티무르 제국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   본래 정식 명칭은 구르카니 혹은 구르칸으로, 그 어원은 부마를 뜻하는 몽골어 귀르겐(gŒregen)이며, 이는 티무르를 비롯한 티무르 왕조의 여러 군주들이 칭기스 왕실의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의 멸망 이후 그 영토에 세워졌던 많은 나라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몽골 제국과의 연관성에서 찾았으며, '칸'은 명목상으로나마 칭기스칸의 직계 혈통인 황금씨족(altan urug)으로 세웠는데, 이는 티무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바부르는 티무르의 5대손으로서, 이미 몽골제국 붕괴 이후 100년도 더 지난 뒤이기에 이러한 전통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무굴 황실은 전반적으로 칭기즈 칸의 혈통보다는 티무르 왕조의 일원임을 강조했다.   강역 면에서는 남인도의 복속엔 실패하고 북인도를 차지하는 데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이슬람에 근거해서 다수의 힌두교도를 지배하는 방식이라 사상적으로 불완전했기 때문에 존립 내내 각처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인도가 워낙 넓다 보니[6], 북인도의 왕조 가운데 데칸 고원 너머의 지역까지 완전히 차지한 왕조는 없었다.   그나마 무굴 제국은 마우리아 왕조 등과 함께 인도를 거의 통일한 몇 안 되는 왕조다. 동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가 중국에 존재했는데, 북동쪽으로 영토가 겹쳤지만 그 영토 사이에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 중 하나가 사이에 있어 별다른 영토분쟁 없이 그냥 무역만 하고 지냈다.   만약 두 국가가 붙었다면 그야말로 아시아 전쟁사 중 세기의 대결이었겠지만, 전기 무굴의 전성기였던 악바르 1세-자한기르-샤 자한-아우랑제브 시대와 청의 전성기였던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대의 차이가 있어서 두 제국 모두 전성기일 때 전쟁할 수는 없었다.   무굴 제국이 한창 전성기일 때는 명나라가 쇠해가는 시절이었고 청나라가 흥하던 때에는 무굴 제국이 골골거렸으니 신의 후계자로 지목, 인도아대륙에 그의 영향력을 심어 놓았을 따름이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여러 해 동안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1526) 왕조이다.     ●무굴왕조 역사 ▶초기 첫번째 황제 바부르[7]는 티무르의 자손이자[8] 모계로 징기스칸의 혈통[9] 을 잇는 인물로 본래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던 군주였는데, 티무르 왕조의 내전과 우즈베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가 1504년, 카불을 점령했다. 바부르는 이후에도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에 대한 재진출을 시도했으나, 우즈베크인들에게 패배해 번번이 실패했다.   이후 바부르는 인도로 시선을 돌렸는데, 바부르는 과거 티무르가 인도를 점령했었고 자신은 티무르의 후손이므로 자신이 인도를 지배해야 할 정당한 군주라고 주장하며 인도를 침공했다. 결국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바부르는 금요 설교를 '힌두스탄의 황제'로서 진행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즈음하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인들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는데, 바부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후마윤과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무굴제국의 상황은 열악했다. 심지어 바부르의 후계자인 후마윤(1530~1556)은 재위 9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군벌에게 패배해 이웃한 페르시아로 거점을 옮겨야 할 정도였다(1540).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의 힘을 빌려 15년 만에 겨우겨우 인도로 돌아왔으나,[10] 1년을 다 못 채우고 사고[11]로 죽었다. 안습   ▶전성기 악바르 1세 (1542~1605, 재위 1556~1605). 흔히 악바르 대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굴은 바로 이 대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열세 살에 즉위해 근 50년간을 재위한 3대 황제인 악바르 대제가 명군이었기 때문이다.[12]   그는 피지배 민족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그 종교적 관용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은 물론 지배계층 및, 황족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이슬람교 전통의 지즈야, 곧 타 종교인들에게만 거둬들이는 인두세도 폐지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하고, 본인 자신도 힌두교인인 라지푸트 출신의 공주[13]와 결혼했으며, 힌두교계 학자와 신하들도 이슬람계와 아무 차별 없이 등용하고 신임했다.[14]   그리고 그때까지 땅 없이 떠돌아다니기 일쑤던 시크교도에게도 힘을 실어주어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도 만들어주었다. 1580년대 이래 악바르의 지배에 놓인 시점 이래 시크교가 자리잡은 펀자브 지방은 지금까지도 가장 큰 시크교의 성역이 되었다. 아 물론, 이러한 조치에 모두가 환영한건 아니고 당연히 무슬림들은 발끈했지만 황제는 그딴 거 신경 안 썼다.[15] 악바르는 치세 중 단순히 종교적 관용만을 베푼 것이 아니라 종교적 토론 또한 즐겼다. 아예 궐내에서 악바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각 종교 대표 논객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논리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동조하거나 등등의 견해 차를 보이며 치열한 입싸움을 벌였고, 악바르는 그 논쟁을 지켜보길 즐거워했다. 여하튼 이 악바르 치세를 기점으로 행정적 체계[19] 또한 갖춤으로써 비로소 안정기를 지나 팽창기에 들어선다. 학자들은 악바르의 치세를 기점으로 하여 인도의 군벌 국가가 제국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현재의 방글라데시인 벵골 지역이 인도에 귀속된 것도 바로 이 시기(1576년). 그의 시기 무굴 제국은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으며, 이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명나라의 힘이 기울어가던 시점이었다. 그 당시 무굴 제국과 명 제국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밋거리 중 하나.   서양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악바르의 동시대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면, 악바르 때 인도에서는 툴시다스라는 시성이 활동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 무렵 쉴레이만 대제 치하에서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악바르와 쉴레이만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거나 사절을 보내는 등의 교류를 하였으며, 악바르 시대에 인도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포르투갈에 맞서는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자한기르와 샤 자한 악바르 대제의 뒤를 이은 4대 자한기르 역시 수완가였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귀족의 어머니를 두었고,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티무르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22] 하지만 자한기르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나빠졌다. 시크교가 자한기르의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게 획책했기 때문이다.   이후 제국의 역사 내내 시크교와의 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크교와의 갈등은 종교적이라기보다도 정치적인 문제였고, 자한기르 본인은 아버지처럼 타 종교에 우호적인 편이어서 관용 정책을 지속해나갔다. 압둘 아지즈의 연구에 의하면 자한기르 때 국고에 쌓인 금이 7톤, 은이 1116톤, 다이아몬드가 80파운드(500만캐럿 이상), 루비와 에메랄드가 각 100파운드(각 650만캐럿 이상), 진주가 600파운드, 그 외 각종 보석이 무진장했다고 하니 그 당시 무굴 제국이 굉장히 부유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종 무굴 제국의 부유함은 프랑스와 페르시아를 합한 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셋째 아들로 계승한 5대 샤 자한(샤 자한 1세, 본명 샤하붓딘 무함마드 후람, 재위 1627~1658)도 ' 세계의 왕'이란 칭호를 받을만큼 나름대로 훌륭한 군주였다. 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영토 확장을 계속해 무굴 제국을 당대 최대의 제국으로 넓힌 것도 업적. 샤 자한 시대의 강역,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칸다하르와 카불도 당시 무굴 제국의 영역이었다. 칸다하르는 끝내 샤자한 후반기에 페르시아에게 뺐기고 말지만... 3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남쪽의 골콘다와 비자푸르도 샤자한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다. 이 두 국가는 이후 아우랑제브가 치열한 전쟁 끝에 합 병해버린다. 당시 무굴 제국의 보병은 90만 명이 넘었고, 기병은 18만 5천 명에 이르렀으며, 1년 세입은 악바르 시절의 2배가 넘을 정도였다.   악바르 시절의 1년 세입이 영국 파운드화로 175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샤자한 시절의 1년 세입은 377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고 한다. 알람기르의 시절에는 3860만 파운드 이상이다! 당시 무굴 제국은 오스만, 사파비, 청나라와 더불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대국 중 하나였다.(프랑스, 스페인도 당시 강대국 대열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애처가였던지라 셋째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국력을 소진시켜 가면서 그 유명한 무덤 타지마할을 지어버렸다.[23] 지금이야 인도의 관광수입을 높이는 세계유산으로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받지만 당시 건설을 위해 동원되고 희생당한 백성들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샤자한 당시 연 세입은 3억 180만 루피 정도였는데, 타지마할 공사에 22년 동안 총 32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연간 약 145만 루피 정도가 들어간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붉은 궁성에 디와니앰과 디와니하스를 지었으며,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짓는다든지 하는 온갖 계획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참고로 붉은 궁성 공사에는 총 60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정체기 결국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마흔 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우랑제브 역시 뭄타즈 마할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사실 어머니 장례식한다고 백성들 등골 빼먹는 격이니 나름대로 쿠데타의 명분은 있었다.   이렇게 6대 황제가 된 젊은 아우랑제브 황제(1618~1707, 재위 1659~1707)는 꽤나 야심만만하고 호전적인 군주였던지라 즉위 직후 바로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때 계획했던 아그라에서 델리로의 천도를 완수했으며, 그 결과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스리랑카를 제외한 남인도까지 거의 다 밀어버린 것으로 판단할 정도. "무굴의 영역은 카불에서 코모린 곶(지금의 타밀나두 주 카니아쿠마리)까지"라는 이야기가 종종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토 면적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 반대로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은 퇴보를 걷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재위 20년을 넘기면서 이슬람빠였던 그가 힌두교도, 시크교도 국민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 그러나 그는 오로지 영토를 제일 크게 넓혔다는 이유만으로 무굴 제국 황제들 중 제일 유명해져 버렸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24] 긴 재위(48년) 내내 팽창정책을 구사했으나 내치에서 퇴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죽고 난 직후 태어난 청나라의 건륭제나 동시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우랑제브 시대의 온갖 병크는 결국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아우랑제브의 강압에 반발한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을 맞았으며, 시크교 역시 그들의 구루가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이래 무굴 제국에 반발했다.   아우랑제브가 분노해 남부 고원의 마라타 게릴라들을 진압하자, 이번엔 시크교도들이 많은 북부가 그들의 반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우랑제브는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채 데칸고원에서 전사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국정 역시 극심한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25] 결국 잘했던 20년보다 말아먹은 30년이 더 부각되는 안습한 인물   ▶쇠퇴기 아우랑제브가 후사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세 명의 아들들이 서로 황위를 차지하려 다투다가인도판 왕자의 난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알람이 형제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로 즉위한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의 병크로 인해 터진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는 마라타 동맹과 라지푸트의 저항을 잠시 잠재우고 시크교도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무굴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아우랑제브와 달리 힌두 귀족들과 라자들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취하여 이교도들의 무굴제국 교화에 많은 신경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바하두르 샤 1세는 즉위할 때부터 이미 나이가 63세의 고령이었기에 제국을 오랫동안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재위 5년 만에 사망한다.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한 뒤 황위를 둘러싼 암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제국의 쇠락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끝없는 분쟁 속에서 황제들이 잇따라 교체 되면서 궁정 귀족들의 세력은 날로만 커져간다. 이러한 황위 분쟁은 1719년 13대 황제 무함마드 샤가 즉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된다. 하지만 이미 무굴 제국이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제국 내 여러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한다. 30년의 혼란 속에서 무굴은 점차 약해졌고, 1738년에 마라타 동맹이 델리를 공격하여 말와 지역을 뺏기게 된다. 거기다 1739년에는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기계 나디르 샤가 델리 근처에서 무함마드 샤의 무굴 제국군을 대파하고, 델리로 입성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뒤, 무굴 제국은 실질적으로는 망했다.   실질적인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 수도인 델리밖에 없는, 그야말로 동주나 신성로마제국, 후삼국시대 후기의 신라 같은 처지가 되었고, 인도 각지는 마라타 동맹 등 힌두계 왕국들과 이슬람계 술탄국인 마이소르 왕국[27],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이 나누어 접수한다. 마라타 동맹과 마이소르 왕국은 둘 다 영국에게 대항하였으나 실패하고 투항하고 만다. 자세한 건 마라타 동맹과 마이소르 왕국 문서를 참조.   이 틈을 노린 영국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7년 전쟁의 인도 전역)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이래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소왕국들을 회유·정복하면서 인도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영국의 꼭두각시가 된 18세기, 19세기 사이에도 무굴 제국은 명목상으로나마 백여 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지만, 제20대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세포이 항쟁을 뒤에서 지원하자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하여 추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굴 제국을 폐지시켰다(1857년). 그렇게 인도 최후의 왕조인 무굴 제국은 330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무굴 제국을 없애고 나머지 남인도 및 스리랑카, 심지어 버마까지 병합한 영국은 전 인도를 아우르는 단일 식민 통치 기구인 인도 제국을 1877년 수립하기에 이른다.    ▶무굴제국 문화 무굴 제국 시기 인도의 문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에 형성된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은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 무굴 제국 시대는 이전 굽타왕조 이후 북인도 문화의 제 2의 정통 시대라 볼 수가 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의 힌두교 문화와 튀르크 – 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티무르의 후손들의 궁전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온 바부르는 인도에 정착한 후 당시 다양한 인종과 신앙 속에서 제각기 발전해 온 인도 문화를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새롭게 정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무굴 제국민들은 건축분야에서 아주 돋보였는데, 그들은 수많은 성과 왕궁, 문, 공공건물, 모스크, 저수 탱크 등을 세운다. 바부르는 특히나 정원을 좋아하여 아그라와 라호르 지역에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이러한 정원들 가운데 카슈미르의 니샤트 바그, 라호르의 샬리마르, 펀자브의 핀조레 정원 등은 오늘날에도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성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은 악바르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악바르 때에는 붉은 사람으로 만들어진 유명한 아그라 성과 파테푸르시크리의 성, 그리고 샤 자한 때 이르러 완성된 델리의 붉은 요새는 현대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들이다. 유력한 설에 따르면 16세기말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해서 그의 손자인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샤 자한은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악바르는 자신의 라지푸트족 출신의 후궁들을 위하여 구자라트 양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페르시아의 양식을 본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양식은 후에 무굴 제국의 중요한 건축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샤자한 때에는 섬세한 힌두 장식과 조형미가 더해져서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이슬람 건축물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중 대표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타지마할이다. 하지만 위에 샤자한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는 무척이나 돈이 많이 들어가기도 했거니와 백성들의 피로감도 상당하다는 부정적 모습들도 보여졌다. 자한기르와 샤 자한 시기에는 이러한 건축물들 말고도 다른 부분에서도 두각을 보였는데, 이들은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에 관심이 많았고 덕분에 많은 문학작품들과 역사서 또한 페르시아어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다.   그 외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힌두 작품들도 이들 언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페르시아의 천문학과 철학을 받아들여 무굴 제국 내의 학문과 접합시키기도 하였다. 이 외에 예술 분야, 의복, 예절 등에서도 페르시아의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공예품들은 일반적인 백성들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들의 사치품들이 발달해 나갔다. 주로 금, 은, 보석 등으로 장식한 무기와 장신구, 섬세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질 좋고 화려한 비단과 벵골 지방의 고급 면직물도 이들의 사치품이었다. 음악에서도 음의 높낮이와 빠르기가 강조되었는데, 인도의 전통악기로 알려져 있는 시타르와 타블라도 이것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복으로는 페르시아의 스카프, 파자마 등이 유행하였으며, 인도의 전통음식들과 서아시아의 음식들이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음식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8일차 1월14일(일) ( 아그라 --> 델리 ) 아침 6시에 기상, 7시 아침공양, 8시 델리로 6시간 이동 , 델리공항 출국 수속 , 19시40분 비행기   9일차 1월15일(월) ( 델리 --> 인천 --> 동대구 ) 아침 6시에 인천 도착 , 6시42분 동대구발 KTX x x x 법성스님, 직지사 불교대학원 여러분들, 그리고 대휴사 신도 여러분들 정말 특별한 인연이 되어 인도 불교성지 순례를 같이 하게 되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기도드리고 하는데 방해나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축원 해드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나 , 같이 여행간 사람들은 서로서로 챙겨 주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습니다. 모두 성불을 이룬 듯 합니다. 귀국 후 모두들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   중간에 편찬하시던 할머니 그리고 부회장님 또 모든 다른 분들 모두 염려가 됩니다 .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만나 뵙게 되면 반가워 인사드리겠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 트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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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3
  •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Ⅴ
    아침 5시에 기상, 6시 아침공양, 6시30분 마야데비사원 , 국경 쉬라바스티 수닷타 스투파, 앙굴리마라 스투파 , 기원정사   20. 룸비니 룸비니로 가기위해 전날 저녁 인도에서 네팔로 국경을 넘어야한다. 인도 쪽의 국경도시는 정말 번화한 상업도시였다. 사람들도 많고 역동적이다. 상가들 마다 각종 물품들로 가득하며 거래도 왕성한 것 같다   이도시는 특히 포목, 비단 가게가 굉장히 성행 한 것 같다. 약 30분을 기다려 우리 가이드 (인도 가이드 크리쓰 : 브라민 출신이며 델리대학 서울대학원 국제학부를 졸업한 수제이다)가 이리저리 좇아다녀 빨리 통과 하였다. 네팔로 넘어와서는 더 기다려야 하는지 1시간 이상 기다린후 통과 되었다. 국가의 출입국관리소가 너무 형편없는 상황이다. 역시나 네팔도 인도 보다 더 열악한 듯 하며 구걸하는 아이들, 아기를 업은 아낙네들은 인도보다 더 극성인 듯 하다. 룸비니로 가는 길은 계속 비포장으로 한창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룸비니 동산은 인도가 아닌 네팔에 있다. 원래 인도나 네팔이나 같은 나라였는데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던 시기에 편리하게 분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엄연히 다른 나라라서 입국 비자가 있어야 한다.  21. 룸비니 동산 (마야데비사원, 무우수 , 구룡못 ) 마야데비 사원 하얀 건물이 부처님의 탄생지이다. 샤카무니 붓다의 원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성취한 사람','일체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붓다Buddha'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뜻으로 나중에 출가하여 성도한 후 일컬어진 이름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자 '샤캬족의 성자'라는 뜻으로 '샤캬무니'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 '석가모니'이다. 간단하게 '석존釋尊'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석가모니 세존'의 줄임말이다. 싯다르타의 아버지 슛도다나(정반왕)는 샤카족 출신으로 카필라바스투라는 작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식이 생기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그런 어느날 왕비인 마야부인이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후 태기가 있었다. 드디어 달이 차서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이 곳 룸비니원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 저는 처음 '룸비니 동산'이란 단어만 보고 이곳이 높은 언덕이 있는 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와 보니 그냥 넓은 정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책 속에서 배운 내용과 실제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걸 확인하고 현실성을 느끼는 것이 답사이고 여행이며 성지순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 흰 건물 터가 붓다가 태어난 장소이다.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낳으신 무우수 나무 붓다는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붓다가 사성계급중에서도 브라만 다음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음을 상징한다. 인도신화에 의하면 첫번째 계급인 브라만은 머리에서, 두번째 계급인 크샤트리아는 옆구리나 겨드랑이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세번째 계급인 평민은 무릎에서, 하층민인 수드라는 발바닥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가촉천민은 어디서 태어날까요?   아예 사성계급에 포함시키지 않으니 태어난 곳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붓다는 태어나자마사 사방으로 일곱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탄생게를 외친다. 하늘 위 하늘 아래를 통틀어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다. 흔히 이 말은 부처님 혼자만 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데, 우리 인간이 모두 다 그렇게 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삼계개고(三界皆苦) 오당안지(吾當安之)'와 댓구를 이룬다.   즉 '삼계가 다 고통속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는 뜻이다. 삼계(三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욕계(欲界)를 포함하여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전부 합한 세계다. 삼계에 있는 무명속의 중생들을 부처가 전부 구제하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이 붓다의 탄생지라는 곳을 알려주는 아쇼카 석주이다. 아쇼카왕은 인도 최초로 통일왕국을 세운 왕인데 통일전쟁과정에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하다 불법(佛法)을 만나 생애 최대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붓다의 흔적을 찾아 그 곳에 아쇼카 석주를 세워 장소의 역사성을 기렸다.   구룡못 이곳은 마야부인이 목욕을 했다는 연못이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물은 녹조를 띄고 있고 결코 깨끗해보이지 않다. 그 나라의 경제사정도 어렵겠지만 인도나 네팔에서의 불교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또 모르지요. 더럽고 깨끗하고의 분별심에 사로잡힌 저와 달리 이대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2. 천불화현탑 23. 앙굴리마라 스투파   24. 수닷타(수달다)장자 스투파   25. 기원정사 기원 정사는 코살라 국의 수도인 사위성(舍偉城) 남쪽에 있는 불교사원으로 석가모니가 생존하였을 때 자주 머물면서 설법한 곳으로 초기 불교의 정사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마가다 국 왕사성(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가람(兩大伽藍)이라 한다. 원래는 코살라 국의 기타(祇陀 Jeta) 태자의 소유였던 동산을 사위성의 수달다(須達多 Sudatta) 장자가 매입하여 정사를 지었다. 수달다 장자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보시를 베풀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그는 동산을 뒤덮을 만큼의 금(金)을 주고서 이 동산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그의 신심(信心)에 감동한 기타 태자가 동산의 일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함께 정사를 건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타 태자의 동산을 의미하는 기수(祇樹)와, 수달다 장자를 의미하는 급고독을 합해서 이 정사를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한다.   기원정사에서 기도 드리는 모습 기원정사는 부처님께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머무신 곳이다. 45번의 우안거 동안 24번의 안거를 바로 기원정사에서 계셨다. 그래서 인지 기원정사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너무나 편안하다..   이 터가 아주 좋은 듯 하다. 부처님이 바로 여기 이 자리에 계셨다니 ! ! ! 그 숨결이라도 느꼈으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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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Ⅳ
    아침 4시에 기상, 5시 아침공양, 6시 사리탑, 대림정사 , 쿠시나가르로 4시간반 이동 가는중간에 케사리아에서 발우탑, 쿠시나가르, 다비장 순례, 네팔로 5시간 이동 룸비니   15. 사리탑 부처님 당시 여덟 나라 사람들 가운데 릿챠비족들이 분배받아 와 세운 사리탑으로 추측된다 근본8탑의 하나로 바이살리 왓지국의 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분배 받아 세운 것이다. 1958년알테카르가 발국을 하였을 때, 기단부에 부처님 유골사리가 아닌, 유골가루사리가 발견되었다. 이탑의 발굴을 통하여 근본 8탑에 대한 경전 내용이 사실과 합치되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발굴과정에서 3번에 걸쳐 덧지어 졌음이 밝혀졌다. 처음 탑이 조성된 후 250년이 지나서 아소까왕이 근본 8탑을 열어 사리를 나눌 때 처음 덧지어 지고, 그 후 2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지금은 기단부만 남아 있으며, 발굴된 유물은 빠뜨나 박물관에 특별전시시에 전시되고 있다. 사리탑 내부 모습 전날 가려다가 문이 닫혀서 못 가고 오늘 새벽 6시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가 입장하였다 새벽 안개비는 자욱하고 세상은 고요하여 성스러움이 더 하다 진신사리탑으로 알려진 이 사리탑은 본체는 다 붕괴되고 흔적만 남아있는데 그 위에 돔 형태의 슬래트 지붕을 얹었다 . 일행 모두 탑돌이를 하고 아침 기도를 하는데 안개와 지붕아래의 울림소리로 잔잔한 기도소리가 너무나 신비롭다. 오늘따라 법성 스님의 염불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   16. 대림정사터, 원숭이 연못, 아쇼카왕 석주 우리일행은 오후에 바이샬리 대림정사에 도착 했다 대림정사는 부처님께서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로 가시기전 쉬었다가 가신 곳이기도 하다.   바이샬리(Vaishali)대림정사 아난다존자 사리탑과 아쇼카석주 이윽고 바이샬리(구 비야리성) 근교 벨루바 마을에 도착한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우안거(雨安居)에 들어간다. 당시는 엄청난 더위와 습도의 계절이었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붓다는 병이 났으나 오래가지 않아 회복한다. 이때 아난다가 묻는다. “세존께서 병이 위중해 몸이 야위었을 때 저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아직 승가에 대해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뒤에야 안심이 들었지요.”   아난다는 열반에 들기 전에 교단을 계승할 사람을 지명해 달라는 뜻이었지만, 붓다는 그러한 생각을 경책했다. “아난다여, 그 기대는 잘못된 것이구나. 나는 내가 이 교단의 지도자라든가, 비구들은 모두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든가 하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이 교단의 후계자를 지명해야 되겠느냐.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교단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붓다에게 부여된 생의 불꽃이 거의 소진될 무렵, 등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악마가 찾아와 “하루빨리 열반에 들라.”고 재촉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악마여, 여래는 스스로 때를 알고 있으니, 물러가라. 지금으로부터 석 달이 지나 나의 본생지 쿠시나가르의 사라쌍수(紗羅雙樹) 사이에서 열반에 들리라.”   앞서 제자에게도 자신의 운명을 알렸다. “아난다야. 내 나이 80에 들어 형상이 썩은 수레와 같으니 이제 더 굳고 강하기를 바랄 수 없다. 아난다야, 너는 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自燈明” “法燈明“ 대승투어에서 나누어준 우리 명찰에도 쓰여 있다   나는 나 자신의 등불이라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불법도 모르는데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전까지 그리고 지금도 이 화두를 계속 생각한다.  인도 비하르주(州)의 주도(州都)인 파트나(Patna) 북쪽 겐지스강 중류에 위치한 바이샬리는 전형적인 빈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불교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붓다와 기녀(妓女) 암바팔리 여인의 사연이 담긴 곳이고, 붓다가 최초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곳이다. 또한 원숭이 떼가 붓다의 발우에다 꿀을 공양한 곳이요, 초기 대승경전인 ‘유마경(維摩經)’의 무대이기도 하다.   암바팔리는 누군가가 망고나무 숲에 버린 아이였다. 그러나 예쁘고 매력이 넘쳐 커서 궁중의 창부가 된다. 그녀는 착한 성품으로 자선활동을 많이 했는데, 이 소문이 마가다국 빔비사리 왕에게까지 알려져 그녀를 찾아간 왕은 암바팔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결국 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게 된다. 이 무렵 붓다가 바이샬리를 지나며 암바팔리의 망고 숲에 머물게 됐는데, 붓다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은 암바팔리가 자기 소유의 망고나무 숲을 승단에 보시한 것이다. 이것이 사원으로도 불리는 암라수원(菴羅樹園)의 유래가 된다. 그녀의 아들은 훗날 스님이 되었는데, 아라한을 이룬 아들의 설법을 듣고 암바팔리는 노년에 비구니가 되었다.   붓다는 성도 후 6년째 되던 해 카필라성에서 아버지 숫도다나왕의 장례식을 치른 후 승단으로 돌아오려는데, 자신을 키워준 이모가 출가를 간청했지만, 전통상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모가 궁중에서 500명의 여인을 데리고 찾아와 간곡히 사정하자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출가를 허락한다. 이것이 최초 비구니 승단이 탄생한 배경이다.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아쇼카 석주 남쪽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연못, 이 연못은 원숭이 떼가 부처님께서 목욕하시도록 판 연못이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 바이샬리는 상업이 발달하여 살기가 넉넉하여, 부처님과 스님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하지 않았다. 발우를 어느 지역에 한 줄로 놓아두면 신도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담아 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처님이 자신의 발우를 제자들 발우에 섞어 놓았는데, 원숭이가 그 많은 발우들 중에서 부처님 발우를 골라내어 근처 나무에 올라 꿀을 따서 올렸고 한다. 이 원왕봉밀(猿王奉蜜)의 이야기는 인도의 모든 불교미술 작품에 두루 나타난다.   원숭이 연못 일정이 바빠서 가까이 가보지는 못하고 차 안에서 촬영 아소카왕 석주는 대략 15미터가 넘는 높이로 그 위에는 동물상들이 올려져 있고 석주 아랫부분에는 왕의 칙령이 명문(銘文)으로 남아있다. 인도 전역에 있는 아쇼카석주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고 있고, 맨 위의 사자상은 부처님의 열반지 쿠시나가라를 향하고 있다.  17. 발우탑 (케사리아 스투파 kesariya Stupa)  쿠시나가르를 향해 가는 도로 오른쪽으로 평지 한 가운데 작은 산처럼 솟은 부처님의 발우를 묻었다는 발우탑이 보인다. 부처님은 대열반의 여정에서 바이살리 근교 벨루바(Beluva) 마을에서 마지막 안거를 나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곳을 떠나 쿠시나가르를 향했다. 구법승 현장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은 리차비족 사람들에게 설법을 마치고 그들과 헤어질 때 수많은 리차비(Lichavi)족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나섰고, 성의 서북쪽 50~60리 되는 지점에 부처님이 그들을 돌려보내시면서 부처님이 사용하시던 발우를 남기셨고 그들과의 마지막 작별의 장소에 세워진 스투파이다.   이곳은 바이살리에서 40km 이상 떨어진 케사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벽돌로 평지 위에 쌓은 가장 큰 대형 스투파이라고 한다. 재 5층까지 발굴하였지만 더 발굴하면 기단까지 합하면 9층 탑이라고 한다. 탑 높이는 52미터로서 인도네시아 보르도보루 탑보다 높다고 한다. 스투파의 절반은 발굴을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나 있으며, 절반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자연 상태로 남아 있으며. 이 대형 스투파의 각 층에는 과거 수행자들의 수행의 공간으로 짐작되는 작은 감실이 있고, 그 감실마다 부처님 좌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부처님 좌상들은 목이 날아가는 등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아마 우상 숭배를 금하는 이슬람교가 인도 땅으로 밀려오면서 생긴 불상 훼손의 결과인 것 같다.   18. 다비당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1주일 뒤 그의 시신은 쿠시나가라 바로 여기에서 '말라'족에 의해 화장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을 놓고서 '말라'족과 '마가다' '베살리' '카필라바스투'와 같은 몇몇 왕국 지도자들의 사절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도나(Dana)'라는 나이 든 사문이었던 '브라만'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그는 평화를 설파했던 분의 유물을 놓고서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합의를 통해 유물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8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그 유물을 안치하고서 '석가모니'의 유덕(遺德)을 경모(敬慕)하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스투파(stupa)' , 즉 불탑(佛塔)이다. 다비당에서 기도 모습 왠지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   부처님 열반 후 사리를 여덟개 나라에 분배하여 근본8탑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밧지국이 8등분한 사리를 봉안하고 사리탑을 건립한곳이며 지금은 이렇게 터만 남아있다. 아쇼카왕때 사리를 수습하여 인도전역에 84,000(팔만사천여)개의 탑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 열반당 부처님께 가사 공양을 드리기 위해 열반당으로 들어가는 모습 부처님께 가사를 새로 입혀드리는 장면  열반당에 들어서 누워 계시는 부처님을 뵙는 순간 눈에 눈물이 핑 돌며 가슴이 먹먹해 짐을 참을 수가 없다. 세 바퀴를 돌고 부처님 발쪽에 서서 부처님의 발을 만지고 도 만지고 연신 만져 본다. 그럴수록 눈물은 더 괴고 가슴이 먹먹타 못해 아파 오는 것을 느낀다. 가섭존자께서 부처님의 발을 들어 올리실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 현장법사 역시 이 열반지를 묘사하면서 마지막 공양을 올린 '춘다'의 집 우물에 맑은 물이 흐르는 등 등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사라나무를 그려내고 있다. "성의 서북쪽으로 3리 정도 가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조금 가면 사라 숲에 이른다. 그 나무는 떡갈나무 비슷한데 거죽이 푸르죽죽하고 잎은 윤기가 있다. 이곳에 특별히 4개의 나무가 있는데 바로 여래가 열반에 든 곳이다. 벽돌로 만든 큰 정사 안에 여래의 열반상이 있는.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있는 형상이다. 옆에 아쇼카의 스투파가 있다. 기단을 허물어져 기울고 있으나 높이는 아직도 2백여 척이 된다. 앞에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여래가 열반한 사적이 적혀있는데 글은 있으나 날짜는 적혀있지 않다." 고타마 붓다의 입멸의 직접적인 원인은, 오늘날의 용어로 치자면, 일종의 '식중독'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랫동안 여래에게 공양할 기회를 기다려 온 보석공 '춘다'는 돼지우리간에서 자생하는 일종의 버섯을 요리하여 정성스럽게 올렸는데, 이 때 여래는 감지하시고도 제자들은 먹지 못하게 하고 이를 혼자만 드셨다고 한다. 감지하신 걸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음식이 다 준비된 상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춘다여, 이 음식은 나에게 공양하고 다른 비구들에게는 공양하지 말도록 하여라."   그 결과 피를 토하는 설사병을 얻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예정된 여행은 계속하여 '쿠시나가르' 동산에 도착하자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고 머리는 북쪽에 두고 얼굴은 서쪽으로 하여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모로 누워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80세의 노령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45년 동안의 전도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노령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안 '석가모니'는 생애의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고서 수도 '라자그라하를 떠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 쪽을 향해 최후의 여행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질서에 관한 지침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아난'에게 '석존'은 이제까지 남김없이 법을 설해왔으며, '스스의 꽉 쥔 주먹'처럼 감추어둔 진리는 없음을 밝히고,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을 설한다.   "아난아, 너 스스로 너의 섬으로 삼고, 또 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서 살아라. 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 밖의 어느 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최후를 기록한 경전의 묘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나를 위해 2그루의 '살라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누울 자리를 깔아달라. '아난'아, 나는 피곤하다. 옆으로 눕고 싶다."고 말하고 , 옆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특히 그는 슬픔에 싸여 울고 있는 '아난'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 울지 말아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가깝고 수종한 것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워진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 안에 사멸(死滅)할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또 '석가모니'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온 '수바다'라는 이름의 고행자가 '석가모니'의 안녕을 걱정하는 '아난'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석가모니는 그 고행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그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명확히 알고자 원하는 의심이나 질문이 있다면 물으라고 3번이나 말했다. 그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 지워진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그대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설법이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바로 곁에서 부축하고 있단 자가 '아난'과 '아나율'이라는 사촌동생이었던 점도 인상적이다. '석가모니'의 사후 교단(敎團)의 지도자가 되는 '가섭'이 석가모니가 임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쿠시나가르'로 달려온 것도 비감(悲感)이 넘치는 장면이다.  편안하게 숨을 거둔 '석가모니'의 임종은 아름다웠다. 그 날을 북전(北傳)에서는 2월 15일, 남전(南傳)에서는 '베사카' 달의 보름이라 한다. '베사카'달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둘 째 달이고 보름은 15일이므로 실제로는 같은 날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라쌍수 나무아래에서 열반하셨다.. 부처님께서 숨을 고르시자 사라나무에서는 일제히 하얀 꽃이 피어 주위가 온통 흰 학처럼 되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무들을 학수(鶴樹) 또는 학림(鶴林)이라 불렀다.   쌍사리수 열반당 순례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린아이들이 우리일행의 관심을 사서 돈을 좀 얻어 볼까하는 마음 으로 계속 석가모니를 외치고 있다. 어쩐지 마음이 너무 안타깝고,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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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7
  •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Ⅲ
    아침 4시에 기상, 5시 아침공양, 6시 라지기르로 버스로 약 2시간 이동 영축산, 빔비사라왕 감옥, 죽림정사, 1시간 이동 , 나란다 대학, 4시간이동 바이샬리 영축산에서 기도하는 모습  기도후 단체사진 , 안개가 짙다 11. 영축산 영축산(靈鷲山)은 붓다가 법화경의 꽃을 피우던 정상 부근의 바위가 마치 독수리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불교의 저 유명한 ‘염화시중(拈花示衆, 꽃을 따서 무리에게 보인다)’이라는 화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하루는 붓다가 영축산 산상법회에서 범왕(梵王)이 공양한 연꽃을 대중에게 들어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통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제자 가섭(迦葉)만이 미소를 지었다. 즉,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쓰이는 ‘염화시중’은 훗날 선(禪) 수행의 중요한 화두가 된다. 붓다는 영축산에 올라 많은 중생을 해탈의 길로 안내했다. 그는 세상을 욕망과 증오, 어리석음으로 불타는 화택(火宅)에 비유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괴로움과 즐거움에 집착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집착을 놓을 때 비로소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영축산 정상에 조성된 설법터에는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꽃과 향을 피우며 연신 절을 올렸다. 불교 성지 어디엘 가도 만날 수 있는 어진 중생의 모습이다. 영축산은 당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독수리밥이 되기 위해 찾아들던 곳이기도 하다. 붓다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그 노인들에게도 열심히 법을 전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는 그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아난 동굴 12. 빔비사라왕 감옥터 13. 죽림정사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인 다자그리하(王舍城이라고도함) 북방에 있는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에 최초로 생긴 불교사원,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죽원가람(竹園伽籃)이라고도 한다. 코살라국 사위성(舍衛城)의 기원정사(祈園情舍)와 함게 불교 최초의 2대가람(二大伽濫)으로 불린다. 석가모니가 생존해 있을 때 자주 이곳에 머물면서 설법한 불교 포교의 중심지였다.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 의하면 가란타죽림은 가란타(迦蘭陀 Kalandaka)장자의 소유로서 왕사성의 여러 동산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가란타 장자는 본래 외도(外道)를 숭배햇으나 뒤에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불교로 개종하면서 이 죽림을 승단에 기증했다. 이 죽림에 당시의 마가다 국왕인 빔비사라 왕이 가람을 지어서 정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 과 <사분율 四分律> 에 의하면 이 죽림도 빔비사라 왕이 보시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 성지를 가던 꼭 어디에선가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이 몰려 온다. 나는 죽림정사를 순례하고 나오는중에 구걸하는 어느 어린 여자아이의 눈빛을 잊을수가 없다. 너무나 애절하게 좀 보태달라는 거의 눈빛은 살고자하는 너무나 애잔한 표정이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 그 애에게 1달러를 건네 주니 똑 같이 생긴 다른 여자아이도 같은 표정으로 구걸을 한다. 그래서 그 애에게도 1달러를 몰래 건네 주니 고마워서 웃고 고맙다며 내 손을 만지며 계속 버스까지 다라와 고맙다고 한다. 그 애들 둘다 머리를 쓰담아 주고 버스에 올랐는데 귀국하는 날가지 귀국한 지금 가지도 게들의 눈빛을 잊을수 없다 . 저 불쌍한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리요. 부처님 ! 부처님은 어떻게 저리 불쌍한 이들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 것입니까 ? 그 애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이 마음은 성지를 다니는 곳곳 늘 똑 같은 현실이며 그 느낌이다. 14. 나란다 대학터 불교최대의 대학 나란다 인도 Nalanda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이곳 출신인 사리불과 목건련에 의해 인연의 뿌리가 내려졌고 그후 승단이 형성되면서 종합수도장으로 성장하여 세계 최초, 최대의 불교 대학으로 교육과 사원의 기능을 같이한 곳이었다. 나란다는 길이 11Km, 폭5km로 1만명의 학인 스님과 1천 500명의 교수 스님들이 살았다고 하며, 5세기 굽타 왕조 시대에 설립되어 1,199년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될 때까지 1,600여 년 동안 인도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과 태국,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이 몰려들어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당대(唐代)에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 스님도 이곳에서 5년간 공부하였고 673년 이곳에 수학했던 의정 스님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이하면, 의정스님이 인도를 방문한 서기 671년 이전에 이미 4명의 신라스님들이 이곳 나란다에 와서 수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낯선 땅 수십만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건 구도의 길을 걸러 이곳 나란다 대학에서 수학했던 우리나라 신라스님들의 이름은 혜업(慧業), 현태(玄太), 현각(玄恪), 그리고 아라야발마라는 이름의 스님이다. 나란다의 찬란한 빛이 파괴된 것은 이슬람의 침공 때문이었다. 1199년 무하마드는 불교사원을 무차별 파괴하였고 스님들은 그들의 만행 앞에 처참하게 죽어갔다.  나란다 불교대학의 거대한 유적은 지금 10분의 1정도 발굴하였고 기숙사를 겸한 사원터 14개소가 드러났다. 유적지 한켠에 부처님 10대 제자중 지혜 제일로 꼽히는 사리불 존자의 사리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으며 그 조각상들도 그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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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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